국외교우
눅15:32
주님의 부활, 나의 부활, 가난한 이방인의 부활
하나님께서는 누가복음을 통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
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 이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이방인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 우리에게도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 즉, 전도와 선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구약시대에도 선교사가 있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요나의 이야기는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본문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선교사 요나와 탕자의 형님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이방인과 동생이 다시 살아난 것을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다른 마음,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마음, 자신들의 사명을
잊어버린 마음 때문입니다.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 4:11)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신10:19)” (참조: 신10:12-22)
“범죄로 죽은 우리를 1)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 1)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엡2:5) (참조: 엡2:1-5)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출 19:6)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벧전 2: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해친 니느웨도 그리스도를 혹은
모르고 심지어 거부하는 이방인들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그랬습니다.
주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되지 않았다면 꼼짝 없이 죄악
속에서 영원한 죽음 속에 살았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연합되어 새 생명
속에 사는 자들이라면 요나와 같은, 탕자의 형님 같은 태도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은혜 입은 자답게, 은혜를 아는 자답게 왕과 같은 제사장되어 이방이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기꺼이 받들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