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36일 서부광야교회 주일 성경공부 동아리 3회 모임

 

1. 21-12

 

1) 1-5

장재훈 : 가나 혼인 잔치와 관련한 부분 먼저 이야기하고 서로 질문하였으면 좋겠다. 1절에서 11절까지다. 혹시 문단 나누기 하신 분이 있으신가? 말씀해 주시라.

 

홍원석 : 11절까지 나누셨는데, 저는 12절이 위에 붙든 아래에 붙든 별 상관없는 것 같다. 11절까지 끊어도 되고 12절까지 끊어도 되는 것 같다.

 

장재훈 : 12절에 대해서 누가 다른 말씀 하실 분 계신가?

 

김진선 : 빼도 되는 이야기인데 왜 굳이 여기 넣어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재훈 : 왜 넣은 것 같나?

 

홍원석 : 제가 볼 때는 가나 혼인 잔치 쪽으로 붙여도 되고, 성전 청결 사건 쪽으로 붙여도 상관없어 보인다. 단순히 상황 전환을 위한 구절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여러 날 머무르지 않으셨다하는 걸 보면 성전 청결 사건이 혼인 잔치 사건이 있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일어난 걸 얘기하는 것 같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가버나움에서 오래 머무르시지 않고 바로 새로운 사역을 하기 위해 출발을 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박중현 : 12절에 의문을 가지고 보지 않았지만 홍 형제가 말씀하신 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정애자 : 그런데 212절까지는 갈릴리 지방 이야기고, 아래는 예루살렘 이야기라서 12절을 13절에 붙이는 게 더 어이가 없는 것 같긴 하다. (웃음)

 

장재훈 : 어이가 없나요? (웃음)

 

홍원석 : 그 정돈가요? (웃음) 그러네요. 지역을 중심으로 보면 그러네요.

 

장재훈 : 성전 청결 사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사건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예루살렘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따로 보는 것이 좋겠다. 12절은 말씀하신 것처럼 중간에 가나혼인잔치와 성전 청결 사건의 중간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밑으로 붙이면 예루살렘의 독특한 사역 부분이 조금 희석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진선 : 12절에 없어도 될 부분을 요한이 왜 집어넣었는지 생각해 봤다. 이제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이니 이때까지는 어머니, 형제들과 같이 있는데 어머니 형제들과 같이 있다는 내용이 여기 말고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중에 야고보도 나오기는 하지만, 공생애와 그 이전의 삶에 대해 오버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한번 건드려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카톡에 요한이 성경을 편집하면서 왜 공생애 시작할 때 잔칫집부터 가신 걸로 기록했을까 하는 의문을 적었다. 그 뒤에 성전 청결 사건이 나오는데 나 같으면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시작하시면서 항상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데 그걸 먼저 기록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잔칫집부터 먼저 가신 것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2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많이 궁금하다. 먼저 성전 청결부터 하고 그 뒤에 잔칫집 포도주 사건을 기술하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첫 표적으로 포도주 만드는 걸로 하니까 여기에 뭔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장재훈 : 일단 그 질문을 가지고 접근을 하면 좋겠다.

그런데 시간적으로는 이것이 첫 이적이 아닐 수도 있다. 요한이 의도를 가지고 특별히 이곳에 배치시킨 것이고 시간 순서로 적은 것은 아니다.

 

김진선 : 내 말은 성전 청결 사건을 먼저 배치했으면 더 의미가 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장재훈 : 그럴 수 있었겠다. 왜 첫 표적으로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 사건을 배치하였을까. 그 이유를 알면 요한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12절까지로 우선 크게 나누고 다시 5절까지 나눴다. 예수님과 마리아가 대화하시는 부분이다.

그 다음에 10절까지 나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상황들이고, 11, 12는 기적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누었다.

아까 질문 중에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왜 첫 번째에 배치했는가는 세부적인 것들을 공부해 보고 나중에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단 1절부터 시작해서 5절까지만 한번 읽고 나눠보자.

 

박중현 : 1절과 2절에 보면 혼인 잔치에 어머니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2절 같은 경우 예수와 그 제자들이 혼인에 청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황과 예수 어머니의 상황이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수 어머니는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에게 이야기를 하고 5절에 보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것은 잔치에 손님으로서 가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초대받고 간 것이 아닌 상황으로 보인다. 지리상으로도 그리 멀지는 않다고 한다.

 

장재훈 : 지도 한 번 보도록 하자.(앱으로 지도를 찾아봄)

 

박중현 : 예수 어머니는 잔치에 손님으로 초대 받았다기보다 그 잔치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정애자 : 지도를 보니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고 가나는 버스로 몇 시간은 걸릴 것 같다.

 

장재훈 : 나사렛과도 꽤 가깝다. 가나와 나사렛은 거의 바로 옆이다.

 

김진선 : 저도 1절과 2절 보면서 예수님 어머니는 혼인집의 친척 정도 되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먼저 그곳에 가있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특별히 초대를 받았다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초대를 받지 않았으면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어머니는 초대를 받지 않았지만 가있는 걸로 보아 잔칫집과 어떤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1절에 보면 예수의 어머니는 거기 계셨고라고 나오는데 2절에는 예수와 제자들도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홍원석 :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한국도 그러지 않나? 좀 친하고 그러면 어머니들이 가서 일 도와주시고, 하지만 그 집 식구들은 따로 초대를 받아야 갈 수 있으니까 그런 정황이 있는 것 같다.

또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신경 쓰고 있는 걸로 봐도 도와주고 있는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어 보인다. 초대받은 입장이라면 포도주가 떨어졌는지 안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김진선 : 옛날에 시골에서는 광에서 잔치를 하면 과방을 본다. 아버지 환갑 때도 그랬고, 과방이 전체를 다 파악해서 다 내주고 싸줄 사람 있으면 싸주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문화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재훈 : 그럼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대한 입장이 많이 다를 수 있겠다. 어머니는 뭔가 책임을 맡은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잔칫집을 지금 고발해야 될 상황이다. 배경을 보면 그 시대에는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면 고발 대상이라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형사 처벌을 받는 것이다.

 

홍원석 : 오 심한데?

 

김진선 : 군대 가서 배식에 실패하면 영창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웃음)

 

장재훈 : 그 시대에는 그랬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하는 말이 분명할 수 있겠다.

술이 잔치에서 굉장히 중요다고 한다.

 

박중현 : 욕을 얻어먹는 상황이다.

 

장재훈 : 욕을 얻어먹는 것 이상의 상황이다. 만일 마리아가 어떤 책임을 맡았거나, 지인이 그 책임을 맡고 있다고 하면 급하게 도와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다른 질문인데, 제가 카톡에 왜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포도주 떨어졌다는 말을 했을까 하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당시에 예수님께서 여러 이적들을 많이 행하시지 않았겠나하는 답이 있었다.

 

김진선 : 아들이니까

 

장재훈 : 아들이라고 와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 (웃음)

 

박중현 : 그러니까 1절과 2절 같은 경우, 어머니의 상황은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뭔가 일을 맡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맥의 이해가 자연스러워진다.

 

장재훈 : 그렇다면 3절에서 예수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럼 4절이 문제다. (웃음)

 

김진선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할 때도 저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카톡에서도 얘기했지만 이전부터 알게 모르게 여러 이적들을 행하셨을 수도 있고, 여기에서 무슨 상관이 있느냐4절은 공생애의 첫 표적이 어머니의 세속적 동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여자여라고 어머니를 부른다. 이 호칭을 공식적인 공생애 시작의 선언으로 봤다. 그 선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들로서 대답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9:26에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하는데 이중적 의미가 여기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육적으로 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나하고는 관계없다고 끊으신 것이다. 어머니의 부탁은 육체적인 일이니, 공생애의 시작으로서 모자 지간으로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여자여이 부분이 자신을 메시아로 나타낼 때까지는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서 이 부분이 이상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19:26을 보니 더 그랬다. 아직 마리아는 믿음이 없는 상태이니까 아들에게 세속적인 동기로 부탁하는 게 당연한 것 같다. 마리아도 영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가야 한다.

한국에서는 여자여가 굉장히 건방진 대답으로 보일 수 있는데 영적인 이중적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엄마한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라는 시각으로 보면 안된다.

 

장재훈 : 한국식 번역의 한계이다. ‘여자여라기 보다는 마담이시여, 여사님~’ 하는 의미다. 3자로 보는 것이다. 나와 혈연관계가 아닌 어떤 여성으로 부르는 것이다.

 

정애자 : 뒤에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를 이해하면 앞의 것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 때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박중현 : 3절을 먼저 좀 얘기하자면, 포도주가 떨어져서 포도주가 모자란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부탁을 한 거다. 그런데 카톡방에서 여러 사람이 얘기했다시피, 저도 공감을 했는데, 이 포도주 표적이 첫 번째냐 두 번째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렇게 부탁을 한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들이 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했고 마리아도 잉태할 때부터 예수님의 특별하심을 알았다. 그런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고, 여러 사람을 통해서 들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자기 아들이면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기대감을 가지지 않았을까?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는 충분한 기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정애자 : 우리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3절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포도주를 만들기를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냥 포도주가 떨어졌다고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포도주를 안 만드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뒷얘기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5절에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포도주를 안만들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장재훈 : 요한이 이것을 쓸 때는 포도주를 기대할 수 있게끔 쓴 게 아닌가 보인다. 정 교우님 말씀하신 것처럼 3절까지만 본다면 그럴 수 있는데 뒤를 읽어보면, 저자인 요한이 우리에게 포도주를 예상하도록 하고 마리아가 와서 요청했다고 이해하도록 글을 쓰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포도주와 관련된 메시지를 좀 던지고 싶은 것 같다.

 

박중현 : 마리아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한 것인데,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까 말한 것처럼 그 이전에 충분히 그런 상황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이심을 전혀 몰랐다면 그런 기대를 전혀 안 가졌을 텐데...

 

정애자 : 그럼 뒤에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내 때는 무엇인가?

 

박중현 : 그걸 말하기 전에 여자여에 대해 제가 가진 생각을 먼저 말하고 4절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말하신 입장은 공감이 간다. 3자로 놓고 자기 어머니를 좀 높여주는 표현을 쓰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해봤다. 제 후배가 대학교 후배인데, 연구원으로 있다. 사적으로 만나면 이름을 부르는데 제가 연구소에 가면 연구원님이라고 해야 되겠더라. 공적인 위치에 있을 때 사적인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나. 그럼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공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냐 아니냐를 봤을 때 저는 있다고 본다.

 

정애자 : 3절은 사적이고, 4절은 공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박중현 : 4절에 예수님께서 공적인 위치에 있다고 본다. 뒤에 11절까지의 주제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은 공적인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제 3자적인 입장에서 여자여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또 예수님의 어머니도 예수님의 위치를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제3자적 입장에서 봐야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인간적으로 덜 민감하게 느끼지 않을까?

그런 차원보다 예수님께서 공적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제3자로서 높이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4절이 12장까지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부분인데 저도 옛날에 다른 교회에서 성경 공부했을 때 이것이 확실하지 않아서 늘 모르고 지나갔다. 그런데 어제 관련된 글을 올렸는데, 임상익 교우도 이 부분을 어려워하고 저도 일주일 동안 계속 생각해 봤다. 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할 때 그럼 때가 이르렀다면 마리아가 요구하는 것과 상관이 있고 요청도 들어주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동안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를 한데 묶어놓고 생각을 하였는데 정 교우님이 내 때가 무엇이냐 하시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내 때를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영광을 드러내는 때로 봤는데 더 헷갈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4절 같은 경우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해놓고 뒤에 가서는 행하시니 더 헷갈린다. 그런데 송진업 교우님이 관주를 참고하라고 하면서 쭉 써놓으신 것을 다 찾아봤다. 그러고 나니 이 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라고 저는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영광을 받는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내 때가 아직 아닙니다’. 두 개를 분리해서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이 말은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지자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해결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세상적인 기대심을 가지고 잔칫집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는 의미에서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봤다.

그리고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때가 아니다그러면서 제가 어제 질문했는데,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을 굳이 왜 했었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 아버지께서 4년 전에 직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버지가 직장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면 제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귀가 솔깃해진다. 제 아버지가 똑같은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 당시 예수님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상황이다. 똑같은 연관관계는 아니겠지만 예수님은 3년 이전이니까 계속 십자가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 받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미리 내 때는 이르지 않았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장재훈 : 3절에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져서 예수님께 요구하실 때 어느 정도 메시아이심을 알았다는 뜻인가?

 

박중현 : 그렇다.

 

장재훈 : 홍 형제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진선 : 나는 아닌 것 같다.

 

홍원석 : 메시아라고 알지는 못했을 것 같다.

 

김진선 : 예수님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도 몰랐다.

 

장재훈 : 뒤에 하는 마리아의 행동들을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인가?

 

홍원석 : 메시아라고 알아서 그랬다기 보다는 아들의 초능력적인 부분들을 목격하지 않았을까? 포도주 조달을 할 정도의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정도지 메시아라고까지 생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4절이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주석을 몇 권 뒤져봤다.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대한 해석이 둘로 갈라지는데 박중현 교우님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시작으로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표적을 행하려 하실 때 어머니가 세속적인 동기로 부탁을 한다. 그래서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끊으신 것이고, 그 뒤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은 공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가 거절이나 부동의의 의미가 아닌 동의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wbc 주석에 보니까 나와 있었다. 전 도움이 안되서 wbc 주석은 안 본다. 그런데 이 구절이 너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꺼내봤다. 그랬더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가 역대상에서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긍정의 의미로 쓰인 예가 있다고 한다. ‘그걸 굳이 나한테 이야기하셔야 됩니까?’로 번역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FF Bruce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이게 난제인 것 같다. 말 뜻 자체가 부동의인지, 동의인지에 대해 신학자들조차도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고 논쟁한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 다음에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이것도 의문문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학설이 있다. ‘이미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이다. 이것이 초대 교회 일부 교부들과 근래 일부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가령 축구팀 후보 선수가 감독에게 감독님, 이제 제가 나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면 형식은 의문문이지만 그 내용은 내가 나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의문문으로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그러면 사실상 어머니 제 때가 왔습니다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된다.

그렇게 보면 5, 6절로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4절이 거절의 의미라면 5절에서 마리아의 반응이 어색하다. 거절했는데도 뭐든지 저분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니까 아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일부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4절의 제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는 부분의 번역 자체가 이미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까?‘라는 의문문으로 되는 것이 맞다면,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수락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얼른 자기 아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종들에게 말하는 부분이 스무스하게 이어진다고 보더라. 제가 침례신학대학원 잠깐 다닐 때도 신약학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두 번역이 있는데 후자로 즉 의문문으로 해석해야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말이다.

그래서 4절에서 동의냐 부동의냐의 해석의 문제, 원문을 부정문으로 볼 것인지 의문문으로 볼 것인지의 번역의 문제가 걸려있고 신학자들끼리도 갑론을박하는 난제라서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씨름한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김진선 : 아무튼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이중적 의미로 영적인 의미, 육체적 의미 2개가 복합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보면 충분하다.

 

홍원석 : 저는 내용이 부드럽게 이어진다는 측면에서 의문문으로 번역하는 설을 지지하고 싶다. 예수님께서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다면서 딱 잘라 거절하는데 어머니가 5절에서 뭐든지 저분이 시키는 대로 해라하면 어색하고 이상하기 때문이다.

 

박중현 : 그런데 어머님이 내 때를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할 수 도 있는 상황인 거는 분명하니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장재훈 : ‘여자여라고 부른 부분은 뒷부분이 부정적인 것을 이야기해야 자연스럽지 않나? 그러니까 내 때가 왔습니다하면 5절까지는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데, 앞부분의 여자여하고 불렀던 이야기와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에서 여자여라고 불렀기 때문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하는 24절은 문장이 자연스럽다. ‘여자여하고 불렀던 어떤 것들과 뒷부분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러니까 5절의 상황을 홍 형제가 왜 어색하게 받아들이냐 하면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하는 것을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결이 안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내 때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메시지적인 면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때가 내 때는 아니다라고 이야기한 것이리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때가 내 때는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지 않겠나. 뒤에 포도주를 만드시지만 이것만이 다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가는 것은 이적 때문이다. 이적이나 기적이나 병나음을 받으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보시지 않는 것 같다 저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배부름을 경험했기 때문에 따라온다고 이야기한 걸로 봐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그것으로 잔치가 풍성해 지는, 단순히 그런 것들이 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내 때는 아까 말한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궁극적으로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이것은 난제니까 그대로 두자. (웃음)

 

김진선 : 2절에 마리아의 이야기는 단순히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인데, 이 한마디에 예수님께서 희한한 대답을 하신다. ‘여자여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이것은 공생애의 선언으로 보게 된 것이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거절의 의미로 보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행동은 내 때가 이른 것처럼 계속적으로 이어 나가시니까.

 

장재훈 : 그러면 그야말로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분명한 때이고, ‘여자여하는 것은 이제부터 내 공생애가 시작되었다하는 중의적인 면이 있다.

 

김진선 : 그러니까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당신의 일이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하면서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내가 해결해 드릴께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중적인 의미라고 본다.

 

장재훈 : 만약 예를 들어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제가 해드리겠다이러면 아직도 공생애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마리아의 육체적 아들로서의 일이다.

 

김진선 : ‘여자여그 한마디로 공식적 선언을 한 것이다.

 

박중현 : 그 공식적인 것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영광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영광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공식적인 것이다.

 

정애자 :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진선 : 나는 그 이상의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장재훈 : 실은 그렇게 봐야 되는 게, 11절에 가면 이게 표적이라고 한다. 표적이란 메시아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라서, 실은 예수님께서 내가 해드릴께요하면 육체적 아들로서 하는 것이 된다.

 

김진선 : 아들로서 해주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사건으로 예수님은 받아들여서 선포로 그러니까 4절에 예수님의 공생애 선포라 받아들였단 생각이다.

 

박중현 : 좀 아까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저는 메시아로 생각을 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전에 141절에 안드레도 예수님을 만나고 시몬에게 말하기를 메시아를 만났다고 얘기했었고, 참된 메시아의 역할에 대해서는 몰랐겠지만, 어쨌든 간에 예수님 만나고 난 다음에 메시아로서 고백을 하게 되고 그 이후 빌립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나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었고 여러 선지자들이 말한 그이라고, 세례 요한도 증언했고. 주변에서 그렇게들 말하는데 가까이 계시는 어머니는 그 이상으로 생각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장재훈 : 그것은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은 해 볼 수 있다. 마리아가 남남도 메시아인지 알고 고백하는데 어머니로서 메시아라는 것을 몰랐을까하고 생각하면 그것을 본문에서 찾아야 된다. 그런데 4복음서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알지 못했던 마리아를 증거한다.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지 않나. ‘예수가 미쳤다, ‘우리 아들이 미쳤다데려가야 되겠다고 하는 부분을 보면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중현 : 그러면 메시아로 생각을 안했다 하더라도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분으로 봤다는 것인가?

 

장재훈 : 그것은 경험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홍원석 : 그것도 추측이다.

 

박중현 : 저도 2절에 그런 의미로 예수님에게 요구했다는 것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다.

 

장재훈 : 이 부분이 추측이라고 한다면 사실 알레고리적 부분에 해당한다. 증거를 댈 수 있는 부분이 몇 장 몇 절에 있다고 하면 명백한데, 그건 아니더라도 다른 정황을 봤을 때 분명하다면 알레고리는 아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다른 누구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예수께 와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스토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거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생애가 시작된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공생애와 일반적인 삶의 부분이 완전히 차이 난다. 갑자기 공생애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어제와 다르게 오늘부터 행동하시는 게 굉장히 다르다. 아까 박교우님께서 이야기하신 후배가 그때 가서는 좀 다르다 하신 것처럼, 이걸 표현하고 있는 것은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김진선 : 공생애 선언으로 보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다.

 

박중현 : 그러니까 장재훈 교우님하고 신건선 교우님은 어떤..

 

김진선 : 나는 신건선이 아니라 김진선인데, 계속 신건선이라고 하신다. (폭소)

신건선 씨가 카톡에 한번도 안올렸는데 왠 신건선이라고 그러나 (웃음)

 

박중현 : 김진선 교우님과 장재훈 교우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충분히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은 했지만, 메시아로 보았느냐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는 것인가.

 

장재훈 : 왜냐하면 이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알았을 것 같다. 이걸 기록했던 시대는 아니더라도 가나 혼인 잔치를 할 때의 사람들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수 있다. ‘저 동네 누가 있는데 굉장히 능력 있고 희한한 사람이 있더라. 갑자기 뭣도 하고 뭣도 하고 하더라.’ 그런데 어느 날 물로 포도주를 만들면 기존에 했던 것하고 똑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야 걔가 평상시에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더니 가나 혼인 잔치에 가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더라.’하면 계속 해오던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있다.

이전에도 그런 능력을 행했을 수 있는데,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 사건은 완전히 색깔이 다른 것이다. 여태까지의 기적과 이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요한이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그 시대 사람들도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도 가나 혼인 잔치 같은 이적들을 행했을 수 있는데 그것들과 이것은 능력적으로는 비슷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부터는 공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기에 전혀 다른 것이다는 메시지를 던져 주려고 요한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문학적 장치이다. ‘여자여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적은 것이다. 그러면 누구나 읽을 때 감안하면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2) 6-12

 

장재훈 : 그럼 뒷부분으로 좀 넘어가자. 6절부터 10절까지를 보겠다.

어떤 게 중요한지 실은 잘 모르겠다. 뭐가 중요할까. (웃음)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어떤 이야기는 그냥 적은 것 같기도 하다가 또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적었겠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김진선 교우님 뭐 질문이나 알게 된 게 있으신가?

 

홍원석 : 제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첫 기적인데 뭔가 웅대한 기적을 보여주면 좋을 텐데 무슨 마술사나 초능력자처럼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은 솔직히 좀 유치하고 초라한 느낌이 든다. 메시아가 겨우 잔칫집에서 술이나 만들고, 박카스 신도 아니고...

 

김진선 : 요한의 편집 의도가 뭘까 나도 궁금했다.

 

홍원석 : 아마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저는 여러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생각해 봤다. 보니까 정결례에 쓰이는 물 항아리가 여섯 개 있다고 했다. 정결례에 쓰인다는 것은 잔칫집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 항아리를 얘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결례라고 하는 것은 흐름으로 봤을 때 메시아와 관계된 것을 분명히 말할 텐데, 유대적 전통을 상징적으로 정결례 항아리로 얘기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그게 여섯 개라고 한다. 성경에서 6이란 불완전수이다. 그러니까 정결례 항아리로 상징되는 유대적 전통의 어떤 불완전성에 대해 저자인 요한이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보니까 물을 채워라하신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드실 때 굳이 물을 채워서 포도주를 만드실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굳이 물을 부어라 하셨다. 그럼 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사실 잔칫집에서 물은 의미가 없다, 술이 의미가 있지. 그러니까 이 정결례 항아리로 상징되는 유대적 전통이 불완전하면서 동시에 의미도 없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물을 채우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에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실 때, 그럼 포도주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구약에서 포도주는 자주 종말을 상징한다. 메시아가 와서 종말이 임하였을 때의 상황을 포도주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항아리 6개에 있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은 유대적 전통의 불완전성과 무의미성을 메시아가 오셔서 포도주로 바꾸는, 즉 새시대, 메시아적 종말이 드디어 도래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상징적으로 안보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게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흐름상 1장에서 성육신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소개되고, 그분이 바로 메시아시라는 세례 요한의 증언이 나오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을 한다. 그 다음에 2장으로 넘어와서, 여기서 세례요한에 의해 증언되시고 제자들에 의해 메시아로 고백되신 예수님께서 새시대를 선언하는, 이제 구약이 아니라 포도주로 상징되는 메시아적 종말의 새시대가 열렸다고 하는 것을 지금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요한이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박중현 : 요한복음의 수신자가 누구인가?

 

홍원석 : 요한공동체일 것이다. 아마 헬라쪽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1장에서 로고스 개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로고스 철학을 깔고 들어가는 것은 헬라쪽 문화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다고 보인다.

 

장재훈 : 이 시대가 헬라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다. 그러니까 요한공동체라는 것도 헬라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공동체였을 것 같다.

 

박중현 : 헬라문화권에 있는 그 공동체가 요한복음을 읽었을 때 그런 상징적 의미를 다 알았을까? (웃음)

 

정애자 : 제일 쉬운 것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람이셨다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지 않은가? 그럼 그 헬라 사람들이 아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구나하면서 그 영광을 드러내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구나이런 것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 맞지 않나.

 

홍원석 : 박중현 형제님 말씀하신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 저는 알 수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결례 항아리, 여섯 개, , 포도주에 대해서 아무 느낌이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포도주 하면 어떤 메시아적 종말의 실현을 떠올릴 수 있고, 정결례 항아리 하면 벌써 그것이 무엇인지 느낌이 오고, 여섯 개라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 독자들이 읽었을 때는 그런 상징들을 알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 우리가 볼 때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이게 다 무언가 하는 식으로.

 

박중현 : 문화권이, 우리가 그 시대에 안살았어서.

 

홍원석 : 저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을 읽는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상징에 대한 이해를 했을 것이다. 왜 하필 포도주일까 하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그래서 1-2장의 흐름이 세례 요한에 의해 증언되고, 제자들에 의해 메시아로 고백된 예수님께서 이제 메시아적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친히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정결례 항아리 여섯 개에 담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의도적으로 앞에 배치시키지 않았을까. ‘이제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메시아적 종말이 시작되었다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김진선 : 그럼 잔칫집은..

 

홍원석 ; 그렇다. 잔칫집도 메타포가 된다.

 

김진선 ; 잔칫집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이 천국 어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천국 잔치로 비유로

 

박중현 : 그게 맞다면 진짜 우리는 공부를 해야 되겠다. (웃음) 공부를 안 하면 모르겠다.

 

장재훈 : 그렇다.

 

홍원석 : 포도주를 찾아 봤는데 실제 구약 성경에서 종말하고 관련된 내용들이 많다. 계시록에도 심판의 이미지가 포도주와 연결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저도 너무 알레고리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문화권을 생각하면 유대인들은 알아들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든다.

만일 그런 상징적인 의미들이 없다면 이것은 이상한 사건이다. 유치하고, 마술사 같고. 죽은 사람 살리고 이러면 좋은데 기껏 포도주.

 

김진선 : 잔칫집에 간 것도 성전에 먼저 가기보다 잔칫집에 가서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메시지를 이중적으로 또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

 

홍원석 : 저도 그런 것 같다. 하필 결혼식이었냐를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는 것이 가진 이미지가 있다. 종말에 예수님이 오신 뒤에 우리가 누릴 잔치의 이미지도 있고, 또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런 부분들을 다 상징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장재훈 : 일단은 우리의 해석을 떠나서 요한이 이 가나의 혼인 잔치를 쓴 이유에 대해서 먼저 보자. 11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그 시각으로 좀 보는 게 필요하다. 일단 이것은 표적으로서 메시아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왜 하필 술을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뭔가 어 저분이 메시아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단순히 어떤 영광이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이 사건이. 그리고 이것을 보면서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고 하니까 메시아로서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어 이분이 진짜 메시아인가하고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게 어떤 부분에서 메시아를 드러내느냐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게 이 본문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찾는 것인 것 같다.

 

박중현 : 그런데 포도주 표적이 메시아를 증명해 주는 의미가 더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계속 제자들을 통해서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고 그들이 인정하게 되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런 증언과 고백들을 표적을 통해 증명해 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홍원석 : 그렇게 본다면, 이 시대가 우리 시대와 달리 과학 시대가 아니다.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시대다. 그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 메시아를 증명할 만큼 큰 기적으로 생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구약에 보면 더 큰 기적들이 많다. 모세는 바다를 가르고, 여호수아는 태양을 멈추게 한다. 그런데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 표적이 메시아의 능력을 입증해 주는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아 보인다.

그래서 저는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가면 메시아의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선포하시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잘 드러난다고 본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새창조의 새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친히 선언하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냈다고 하면 오히려 말이 되지 않을까?

 

박중현 : 그런데 11절에 영광을 나타냈다고 하는 것이 본문에 나타나있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되지 않을까.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장재훈 : 물이 포도주가 된 그 사건 자체가 영광을 나타내셨다?

 

박중현 : 기적의 어떤 수준을 떠나서 자그만 것이라도 10절에 보면 확실하게 영광을 나타냈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진선 : 11절에 대해 질문이 있다.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무엇을 믿은 걸까? 메시아를 믿은 걸까? 뒤의 22절에 보면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 후에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그때서야 믿었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메시아를 믿었다고 하는 표현은 무엇인가?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인가?

 

박중현 : 22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믿은 것인가를 봐야 한다.

 

김진선 : 22절은 부활 이후의 것인데, 11절에서 믿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믿었다는 것일까를 묻는 것이다.

 

홍원석 : 이 믿음이라는 것은 과정을 얘기하는 것 같다. 이미 1장에서 제자들은 다 고백했다, 당신은 메시아라고. 이미 믿은 것이다. 그런데 또 믿게 되었다고 하고, 뒤에 가면 부활 뒤에 또 믿게 되었다고 하니까 믿음이 조금씩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한 게 아닐까.

 

김진선 : 아까 다 메시아를 얘기를 해서 내가 그걸 질문한 것이다.

 

홍원석 : 믿음이 좀 더 깊어졌을 것이다. (웃음) 이미 메시아 고백은 1장에서 다 했으니까.

 

박중현 : 그러니까 저는 증명, 입증이란 면에서 포도주 표적으로 더 확실하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명했다는 것이다.

 

홍원석 : 맞는 말씀이신데, 거기다 상징성을 더해주면 더 입증이 잘된다.

 

장재훈 : 그럼 그 상징성이, 그걸 보고 풍유적 해석,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옛날 분들은 설교를 어떻게 했냐 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뭘 꺼내고 뭘 발라주고 하는 것에 하나씩 다 의미를 대입시켰다. 그것을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근거를 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비유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비유 하나하나에 의미를 집어넣었다. 그게 성경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으면 괜찮고 아니면 알레고리라고 한다.

그런데 홍 형제가 한 이야기는 굉장히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찾을 수 있으면 괜찮다. 그런데 지금 말했던 것처럼 여섯 개의 항아리가 있었는데 그게 아까 말한 유대적 전통을 대표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냐를 본다면 그것은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6절에 그것을 그렇게 설명을 해뒀다. 유대 사람들의 정결예법을 따라서 해놨다고 하니까 특별히 요한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결예법이나, 구약적인 것이나, 전통적인 것을 대변하기 위해 물 항아리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 물 항아리였는지 아닌지 아니면 그냥 항아리였는지 아니면 식수를 갖다 놓은 건지 모르는데 요한은 그것을 특별히 정결예법의 항아리라고 표현하니까 우리로 하여금 아 이것은 구약적인 어떤 언약이나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의 부분이라고 생각해라 하면서 기록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게 뭔가로 대체되는 것이다.

특히 또 여섯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숫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숫자가 뭔가를 의미한다. 창세기 1장도 7이라는 숫자가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완전하다는 의미이다. 6은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는 정결예법 이런 것들이 불완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해도 충분히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본문 자체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물이라는 것도, 이미 물은 등장했다. 1장에서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다. 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게 벌써 불완전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은 완전한 것인데 자기가 주는 물세례는 뭔가에 의해 대체되어야 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은 완전하지 않은 뭔가를 예표하는,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요한이 이미 물로 표현하고 있었다.

지금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럼 물이 무엇으로 대체되느냐 하는데 포도주로 대체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홍 형제는 포도주를 구약에서 가져왔는데 그것을 구약에서 가져와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말씀하시면 구약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 신약을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이 언약의 피다라고 이야기를 하시고 그것이 기존에는 뭔가 제사를 지내야 되고 동물을 죽여야 되고 했던 불완전한 제사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완전해 지는 것들을 드러내니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증명하는 완전한 제사, 하나님과 우리와의 언약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는 어떤 것들이 아닐까. 그렇게 대체된다고 해야지만 이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김진선 : 아무튼 결례에 대해서도, 역대하에 제사장들이 씻기 위해 번제물도 물로 씻고 하는 그게 있으니까 그것과 비슷하게 유대인들도 그런 형식들을 갖춰 놓고 그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장재훈 : 그렇긴 한데 좀 매끄럽지 않은 느낌이 있다. 4절하고 이게 뭔가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박중현 : 이 정결례 항아리가 결례에 따라 손을 씻는 항아리라고 볼 수 있나?

 

장재훈 : 멀리서 손님들이 오시면 손발을 씻어야 된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발을 꼭 씻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손발을 안 씻고 뭘 드시니까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꼭 해야 한다. 율법에 있지는 않지만 유대적 전통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다.

 

김진선 : 제사드릴 때 번제는 물로 꼭 씻는 물통이 있었지 않나?

 

장재훈 : 그것은 물두멍으로, 제사장이 몸을 씻거나 짐승을 씻길 때 쓰는 용도인데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정결례다. 각자 집에 물 받아놓고 손발을 꼭 씻었다.

 

박중현 : 저는 굳이 포도주를 만들려면 물 먹는 데서 하지 굳이 손 씻는 그 통에다가 포도주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장재훈 : 그러니까 그 통이 바로 말씀하신 것처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똑같은 의문을 가지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먹는 물통에다가 포도주를 만들면 편한데 왜 힘들게 손 씻는, 아니 손을 넣어서 씻는 게 아니고 물을 받아놓는 것이다. 물을 떠서 씻는 것이다.

 

김진선 : 거기는 먼지가 많고 신발도 안 신고 다니니까 손님이 오면 씻을 수 있게 물을 내놓는다.

 

박중현 : 아 손을 넣어서 씻는 게 아니라.

 

장재훈 : 그게 이제 물 항아리이다.

 

김진선 : 아 그럼 구정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걸로 상상을 하셨구나. (웃음)

 

정애자 : 뚜껑이 항상 있다.

 

장재훈 : 물 길어 와서 그것을 항아리에다 보관했다. 종들이 굉장히 힘든 일을 한 것이다. 본문에서도 종들이 여기 물을 채워 넣고 다시 또 그것을 갖다 준다. 이중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럼 왜 이중으로 일을 하도록 시켜가며 해야 되는가는 예수님께서 뭔가 던지려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김진선 :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얘기해 주려고 하는 것 같다.

 

장재훈 : 빨리 넘어가야 되겠다.

 

 

 

 

 

2. 213-25


1) 13-22

장재훈 : 저는 여기서 질문이 많았다. (웃음)

 

박중현 : 갑자기 생각이 난 건데 17절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이것은 13절부터 16절까지의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어떤 관련이 있는 궁금하다.

 

홍원석 : 요한이 17절에 이 구절을 집어넣은 의도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암시하는 것 같다. 성전에 들어가서 기득권자들을 내쫓으면 분명히 반발을 살 텐데, 그런 열정 때문에 죽게 된다는 것을 살짝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장재훈 : 일단 14절에 소, , 비둘기파는 거나 돈 바꿔주는 것은 그 시대로 볼 때는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먼 데서 짐승 데려오다 다치거나 죽으면 못 바치니까 가서 사야 되고 히브리 돈이 없고 다 헬라 돈을 쓰니까 히브리 돈으로 이것을 바꿔 줘야만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좀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 만들어서 사람도 내쫓고 동물도 내쫓고 상도 엎으시는데 사람들이 가만있었을까? (웃음) 가만히 안 있었을 것 같다. 그 사람들이 한 두 명도 아닐 텐데.

 

김진선 : 그러니까 그때부터 죽이려고 한 것이다.

 

홍원석 : 아 그게 아니라 그 현장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덤벼들어야 정상이지 않나 하는 얘기다.

 

장재훈 : 그렇다. 내 물건을 쫓아버리고 뒤집어 없는데 거기에 맞서서 때리든지 싸우든지 하는 게 정상이지 않나?

 

김진선 : 나도 그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들이 워낙 폭리를 취하는 나쁜 사람들이고 기득권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장재훈 : 그렇다면 더 가만히 안 있었을 것 같다. 기득권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사렛 촌에서 온 촌놈이 와서 다 뒤집어 없고 있는데.

 

김진선 : 워낙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 오기 때문에 이 장사하는 사람들도 자기들 얼굴이 있어서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돈도 있고 정치적으로 뭔가 끼고 하는 사람들이기에 자기들이 너무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원석 : 그것은 너무 낭만적으로, 착하게 봐주시는 것 같다. 저도 어떤 영화에서 봤는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다 뒤집어엎으시는데도 사람들이 쫓아만 가고 잡지를 않았다. 그 대목이 정말 어색해 보였다.

 

장재훈 : 권위 때문인가?

 

김진선 : 다 세력을 끼고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이 가서 장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한마디만 했을까? 다 믿는 사람들이니까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을 것이고 마음이 찔려서 그랬을 수 있지 않을까?

 

홍원석 : 지금 장재훈 교우님께서 얼핏 권위 때문인가?’ 하셨는데 저는 그게 맞는 것 같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자기 뒤에 오시는 분으로 증언했고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메시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선지자로는 보고 있는데 선지자가 와서 뒤집으니까 감히 대들지를 못한 것 같다. 일반인이 했으면 다 달려들어서 미친놈이라며 팼을 텐데 선지자가 하니까 차마 못 덤벼들지 않았을까.

 

박중현 : 그건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무대포로 나가는 사람한테 함부로 덤비지 못하지 않는가.

 

김진선 : 거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장재훈 : 그게 거의 조직일 텐데, 누가 한 사람 개인이 와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김진선 : 감히 예수님을 건드릴 수 없는 권위가 있었던 것 같다.

 

홍원석 : 세례 요한이 메시아로 지목을 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유명한 만큼 예수님도 어느 정도 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차마 못 덤벼들었을 것이다.

 

장재훈 : 예수님이 세례 요한보다 훨씬 유명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세례만 주고 별 것 없었는데 예수님은 병도 고치고 여러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에.

 

김진선 : 그러니까 겨우 와서 한다는 소리가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라고 한다.

 

홍원석 : 이 사람들이 성전 관리자들일 텐데 일반인 같았으면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표징을 보여 달라당신의 행동이 영적이고, 합법적이라는 근거를 보이라는 얘기를 한다. 꽤 신사적으로 대하는 걸로 봐서 예수님께서 상당한 권위를 갖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정애자 : 며칠 동안 계셨다가 오셨으니 소문도 났을 것이다. 전화가 없었긴 했지만 (웃음) 카톡도 없었던 시대지만 (웃음) 입으로 하는 게 더 빠르다. 가버나움에 계셨던 며칠 동안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이미 가나에서 표징을 한번 보여준 게 있는데, 이번엔 또 무슨 표징을 보여 줄 거냐고 묻는 것 같다.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김진선 : ‘당신 메시아면 다른 표적도 보여 봐라했던 것 같다.

 

장재훈 : ‘표징을 보여 달라18절의 말씀을 봤을 때는 유대 사람들도 인정을 하진 않지만 메시아라는 소문이 있는 것은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표징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겠지. ‘미친 놈 왔다고 하지 않고 당신 진짜 메시아면 표징을 보여 달라하는 것은 어느 정도 소문을 듣거나 그런 것으로 보인다.

 

(상익 형제 들어 옴)

 

박중현 : 18절에 보니까 그런 뉘앙스가 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성전 안에서 돈을 바꾸는 것과 짐승을 파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고 상을 다 엎으신 이유는 아까 김진선 교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사람들이 순수하게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남기는 세속적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 예수님께서 이렇게 화를 내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러면 돈을 바꾸고 짐승들을 파는 것을 성전 안이 아니고 밖에서 하면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전 안에서 문제가 된다면 밖에서 하는 것은 타당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재훈 : 밖에서 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장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홍원석 : 스가랴 14:21절이 관주인데 이렇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도 만군의 주님께 성별된 것이 되어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모두 와서 그 솥들을 가져다 고기를 삶을 것이다. 그 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성취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몸소 성취하신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스가랴에도 성전에 장사꾼이 있는 것으로 나오고, 16절에서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셨으니까 이 사람들이 제사 지내러 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장사를 하는 상업 조직이 돼서 부패한 것이다.

 

박중현 : 그러니까 그게 성전 안이 아니더라도 그런 목적으로 하면 타당한가?

 

홍원석 : 여기서는 장사하는 게 포인트가 아니고 그날에 만군의 주님의 날에 장사꾼이 없을 것이다’, 즉 메시아가 와서 종말이 왔다는 것이다. 메시아가 온다는 게 곧 종말이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전을 그렇게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스가랴 14:21의 성취로서 메시아적 종말의 새 시대가 온 것을 직접 몸으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지자적 상징 행동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상징적인 행동들을 한다. 예수님도 그와 같이 행동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가 벌거벗고 다닌다든지, 호세아가 음탕한 아내와 결혼했다든지, 똥을 구워먹은 선지자도 있고 그런 것처럼 예수님께서 스가랴 14:21절의 성취를 선지자적 상징 행동으로서, 액션으로 메시지를 보여 주신 것으로 보인다. 장사를 하고 있다는데 포인트를 맞추기 보다는 예언이 성취되고 메시아적 종말이 왔다는 데 포인트가 있다.

 

박중현 : 주된 목적은 그런 의도가 있는데 저는 단지 성전 안에서 그랬다 하니까 성전 밖에서 하면 상관없는가 하는 생각을 얼핏 했었고 성전 밖에서 작은 이윤만 남기고 도우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면 문제가 안 될 것 같은데, 성전 밖에서 하더라도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장사를 했다면 그것도 똑같이 예수님께서 밖에 나가서라도 다 내쫓지 않으셨을까.

 

홍원석 : 안하셨을 것 같다. 왜냐하면 스가랴 예언의 성취는 성전 안에 있는 장사꾼을 쫓는 것이다. 포인트는 성전을 청결히 하는 것이지 장사치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장재훈 : 정말 성전 밖에서 그런 일들이 있었다 해도 가만히 두셨을 것 같다. 처음 질문했을 때는 성전 안이나 밖이나 똑같지 않나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봤을 때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이유가 성전이 원래 기능에서 벗어나서 장사하는 집이 되면 안 되는데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셨으니까 분노하신 것이다. 성전 밖에서 그런 장사를 하면 물론 그것도 분노하실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엎거나 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고, 이것이 분노하실 일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세금을 낼 거냐 말 거냐의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께서 세금 내야 되는 건 내고 그러니까 이게 장사를 하거나 이런 부분을 주목하신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성전 자체가 상인들과 결탁했을 것 같다. 성전 밖에서도 틀림없이 장사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성전 밖에도 있고, 성전 안에도 있다. 야구장 밖에도 있고 야구장 안에도 있는데 (웃음) 그런데 야구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뭔가 있어야 그런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특별한 특권을 받은 것인데, 그것은 대제사장이나 이 안에 있는 종교지도자들과의 연계가 있었을 것 같은데 돈이 오갔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임상익 : 제가 늦게 와서 그러는데...

 

홍원석 : 16절이다.

 

장재훈 : 성전 뒤집어엎는 장면이다. (웃음)

 

임상익 :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메인이 장사가 나쁘다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제가 봤을 때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거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노하신 것이고, 만일 성전 밖에서 생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게 아니라면 그런 것은 노하실 일이 아니지 않나 싶다.

 

박중현 : 성전을 대상으로 했다 하더라도?

 

김진선 : 밖에서 사람들이 이윤을 추구하고 먹고 사는데, 삶이 그건데.

 

홍원석 : 그리고 아까 얘기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우리와 달리 구약을 알고 있으니까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행동 하시는 것을 보며 스가랴 말씀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종말에는 성전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구절을 떠올리면서 저 사람이 혹시 메시아인가 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김진선 : 그러니까 제자들도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킨다는 구절을 떠올리며 알아차리지 않았나.

 

장재훈 : 정말 예배를 위한다면 성전 안에서 공짜로 환전을 해주거나 이윤을 남기지 않고 동물을 팔거나 아니면 인건비만 조금 남기고 팔거나 해야 되는데 5만원에 사와서 15만원, 20만원에 파는 식의 행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분노하셨을 것이다.

 

박중현 : 그게 어떻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과 연결이 되나?

 

김진선 : (약간 흥분) 예수님의 성전 청결은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제사를 제대로 드릴 수 있도록 말이다.

 

장재훈 :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정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김진선 : 그러니까 제자들이 성전에 대한 열정이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지 않나.

 

홍원석 :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열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박중현 : 그런데 이게 13-16절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않나. 물건을 파는 그런 내용인데.

 

장재훈 : 16절까지의 사건을 17절로 설명하는 것이다.

 

박중현 :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장재훈 : 주님의 집이 깨끗하기를 바라는 열정이나 소망이나 이런 것들이 미움을 받아서 곧 죽게 되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박중현 : 그럼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정은 누구를 말하나?

 

장재훈, 홍원석 : 예수님이다.

 

박중현 : 예수님인가?

 

박중현 : 나는 거꾸로 생각했다. 이게 예수님을 말하는 것인가?

 

홍원석 : 인용된 시편 36:9절은 고난 받는 의인의 성전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난 받는 의인은 예수님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집어 삼킨다는 것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암시로 봐야 한다.

 

장재훈 : 이러면서 제사장이나 유대 지도자들하고 원수가 되니까.

 

박중현 :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은 주체가 예수님이고, 나를 삼키려는 주체는 유대인들인가.

 

장재훈 : 그렇다.

 

박중현 : 하나 깨달았다.

 

임상익 : 그런 건가? 그렇군.... (웃음)

 

김진선 : 나중에 그 부분만 보라.

 

홍원석 : 토의한 거 카톡에 올린다. (웃음)

 

박중현 : 그게 관주에 있나? 스가랴?

 

홍원석 : 있다.

 

정애자 : 스가랴 1421

 

홍원석 : 관주는 스가랴 1421절이고,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은 시편 69:9절이다.

그런데 어쨌든 앞에 나온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랑 성전 청결 사건 둘 다 메시아적 종말의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장재훈 : 그럼 결국 완전히 다른 두 사건인데 두 개는 비슷한 걸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된다. 여태까지 알고 있던 가나 혼인 잔치 사건과는 의미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김진선 : 그러니까 4절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홍원석 : 근데 4절이 난제다. (웃음)

 

김진선 : (약간 흥분) 아니 근데 나는 분명히 그렇게 봤다.

 

홍원석 :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하는 것 자체도 부동의로 볼 것인지 동의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고, 그 다음에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도 부정문으로 번역할지 의문문으로 번역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김진선 : 주석이 뭐라고 얘기하든 그건 상관없이 그냥 어머니의 포도주가 떨어졌다라는 질문에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그냥 대답이 아니라 공식적인 공생에 선포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홍원석 : 맞다. 양쪽 해석이 서로 논쟁하지만 모두 4절은 공생애의 선포로 본다. 다만 거절하고 뒤로 넘어가는 부분이 매끄럽냐 매끄럽지 않냐의 문제일 뿐이다.

 

김진선 : 거절로 보지 않고,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장재훈 : 어떤 부분은 실은 꼭 해석을 해야 되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분명한 것만 가지고도 해석할 수 있다. ‘여자여했던 부분과 내 때가 되지 않았다는 부분이 사적인 말이 아니라 공적인 선언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정도만 봐도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한 요한의 의도가 드러난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어떤 내용으로 시작되느냐, 옛날에 가지고 있던 유대적 전통, 관례 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언약으로 대체시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전체적인 가나 혼인 잔치의 해석들이 연결되고 그러고 나서 성전 청결 사건으로 연결되면, 또 방금 했던 대로 성전 청결 사건이 예언의 성취라든지 종말이 왔다 하는 것을 알려주고, 종말이 어떻게 왔냐 예수님 오셨으니까, 메시아가 오셨으니까 내가 왔기 때문에 예언의 성취가 왔다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 것 같다.

 

김진선 : 예수님 어머니가 예수님께 사적으로 물어 봤는데 예수님은 사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적으로 다루셨다는 것이다. 메시아적으로.

 

장재훈 : 그럼 19절부터 드러나는 이 성전은 예수님이 분명한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하기야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요한이 얘기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따지면 앞의 성전 정화 사건도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을 얘기해 줄려고 요한이 그 사건을 가져와 붙여서 이야기한 것 같다.

 

홍원석 : 메시아가 도래함으로써 성전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메시지를 의도한 것이다.

 

장재훈 : 그렇다. 그러면 실은 성전 청결 사건이 가나 혼인 잔치와 똑같은 메시지를 가진 것인가 보다. 가나 혼인 잔치도 유대 전통이 새로운 언약으로 바뀌는 것처럼, 성전 청결 사건도 성전 개념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는 그런 얘기를 둘이 똑같이 하는 것 같다.

 

홍원석 : 장재훈 국장님 다 아시면서 보조 맞춰주시는 게 보인다. (웃음)

 

장재훈 : 아니다. 정리만 하는 것이다. (웃음)

 

홍원석 : 사실은 다 아시면서 발맞춰 주시는 것 같다. (웃음)

 

장재훈 : 절대 아니다. (웃음)

 

임상익 : 질문이 있다. 우리 몸도 성전인가?

 

장재훈 : 그렇다.

 

임상익 : 그럼 그거랑 예수님이 성전이라고 하는 거랑 차이가 무엇인가?

 

(잠시 침묵)

 

장재훈 : 두 개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대답 좀 해보시라. (웃음)

 

홍원석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 되는 것이다.

 

임상익 : 우리 몸은 예수님이 거할 집이라는 개념인가? 처소라는 의미인가?

 

홍원석 : 그렇다. 영어로 Holy House라고 하더라.

 

임상익 : 예수님은 그 자체시고?

 

김진선 :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전인 것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안계시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영광도 1장에서 나오는 영광이, 여기서 영광을 봤다고 하면 예수님이 거기에서 그런 일들을 하셨기 때문에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장재훈 : 여기서 실은 성전이 두 개가 나온다. 3일 만에 새로 새운다는 성전과 허물라는 성전이 있는데 실은 원래 예수님이 성전이고 구약에서 세웠던 성전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황금으로 뭘 만들고 휘장을 어떻게 하고 크기를 어떻게 하고 하는 것들이 다 의미가 있다. 우리가 레위기나 솔로몬이 성전 짓는 부분을 배우면 이게 뭘 의미하는 지가 드러내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 그분의 독특한 뭔가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성전이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물로 쓸 짐승을 잡거나 하는 것들도 실은 그걸 하면서 예수님을 알게 된다.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가 실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사를 드리는 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있지만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중에 누군가가 오시는데,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것이 예수님인지는 실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그분이 오시면 이런 것들을 하지 않아도 되고 완전한 뭔가가 오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세례 요한이 물 세례 주고 있지만 실은 이것은 폼이다. 진짜는 성령이나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물로 세례를 준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성전을 지어놓은 것도 성전을 보면서 누군가 큰 건물로 황금으로 덮어 씌우고 해야 되는데 그런 것들이 다 필요 없는 그런 기능을 하는 누군가가 오신다’,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다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짐승도 이 짐승도 잡고 저 짐승도 잡고 기름을 태우기도 하고 불사르기도 하고 밀가루를 태우기도 하고 이러는데 그게 다 필요 없어진다. 누가 한분만 오시면 된다. 그분이 누구냐 바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다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걸 하는 것이다. 굉장히 심플해지고 간단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면 이 성전이 예수님이 된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원래 성전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게 솔로몬의 성전 같은 것이다. 모세의 제사 같은 것들이 그런 기능을 한다.

 

홍원석 : 저도 하나 생각나는 게 있는데 성전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성전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데 사실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를 또한 갖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에 가야지만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나를 통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진선 :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성전에 있는 휘장이 찢어진다. 그 의미다. 그래서 우리와 교통이 된다.

 

장재훈 : 우리도 성전이긴 한데 성전 기능의 일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전 자체는 아니다. 성전 자체는 오직 예수님이시다. 그분만이 성전이시다.

 

임상익 : 공간 제공 느낌인가?

 

장재훈 : 그것은 아니다. (웃음)

 

김진선 : 애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눈에 있냐 가슴에 있냐 머리에 있냐 하는 질문과 비슷한 것 같다.

 

장재훈 : 우리는 예수님과 관계로 동화되니까,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거룩함을 우리가 받게 되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우리가 공간 개념은 아니다. 그분이 3차원 공간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는 존재 자체로 변하니까 성전과 같은, 그래서 성전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완전한 성전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임상익 : 알겠다.

 

 

2) 23-25

장재훈 : 그런데 저는 2425절이 정말 어려웠다.

 

김진선 : 나는 거기는 읽기만 하고 보지도 않았다. (웃음) 그냥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한 걸로.

 

홍원석 : 나다나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너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봤다하시니까 깜짝 놀라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부분인데, 23절에 표징들을 보고 믿었다는 부분과 연결 지어서 이 사람들이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니라 표적을 쫓아오는 종교적 믿음이었기 때문에 이런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장재훈 : 표적을 보고 믿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 않나? 여기서는 좋은 의미로 쓴 것이 아닌가?

 

김진선 : 23절에서 표적을 보고 믿은 것을 24, 25절에서 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부정적인 의미로.

 

정애자 : 제목 자체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신다고 되어 있는데 표징이라는 것은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이라 의미 자체는 좋은데.

 

장재훈 : 실은 표징은 보고 믿으라고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김진선 :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표적에, 먹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나? 그래서 쫓아온 것이 아닌가?

 

홍원석 : 그래서 6장에서 예수님께서 모인 사람들에게 내 피를 먹고 내 살을 먹어라 하셨더니 다 떠나버렸다고 하는 것이 연결된다.

 

정애자. : 23절이 24, 25절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맡기지 않았다고 하시니까.

 

장재훈 : 그러니까 24, 25절은 굉장히 부정적인데, 23절은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하니 부정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

 

박중현 :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고 한다. 이름을 믿었다면 그 이름에 담겨진 의미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순수하게 완전히 깨닫지는 못한 것 같다.

 

김진선 :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알고 있는데 진짜 믿는지 아닌지 다 안다는 것이다.

 

정애자 :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고 한다.

 

박중현 : 그 이름을 믿는 것에 대한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장재훈 : 그러면 김진선 교우의 말씀대로 한다면 실은 표징이라는 것은 믿으라고 준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게 해서 믿는다고 다 좋은 믿음은 아니다 이런 거네.

 

김진선 : 믿는다고는 하지만, 믿는다고 쫓아다니는데 예수님을 믿기 위해 쫓아다닌 것은 아닌 것이다.

 

장재훈 : 어떻게 생각하시나 맞는 것 같나? (웃음)

 

임상익 : 약간 혼란스럽다. (웃음)

 

홍원석 : 저도 질문이 생겼다. 11절에서 가나의 표징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는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고 하니 표현이 다르다. 예수님 믿은 것과 예수님의 이름을 믿은 것은 좀 다른가?

 

장재훈 : 같은 것 아닌가?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었긴 믿었지만 그것도 완전한 믿음은 아니었다. 완전한 믿음 같으면 예수님 배신안할 텐데 다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나.

 

김진선 : 아까 믿음에 대해서 다른 얘기를 했지 않나. 여기저기서 믿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믿음이 자라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이 무리들은 제자들과는 조금 다른 표현인 것 같다.

 

장재훈 : 몸을 맡기지 않았다는 게 어떤 뜻인가?

 

임상익 : 저도 그게 궁금했다.

 

김진선 : 하나님한테만 몸을 맡기시지.

 

장재훈 : 다른 번역에는 뭐라고 되어 있나?

 

홍원석 : 가톨릭 성경에는 신뢰하지 않으셨다’, 우리말 성경은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바른 성경도 맡기지 않으셨다’. 현대인의 성경은 맡기지 않으셨다’. 공동번역은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임상익 : 신뢰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것 같다.

 

김진선 : 이들이 감정적이라는 게 표징을 볼 때는 믿는 것 같지만 또 먹을 것도 안주고 아무 것도 안하면 이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지 않나. 그러니까 의탁하지 않고 돌아다니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홍원석 : 상익 형제 entrust가 혹시 무슨 뜻인지 아시나?

 

임상익 : 잠시만요. (휴대폰으로 검색함) (웃음)

 

홍원석 : ESVNASBentrust라고 되어 있다.

 

임상익 : 맡기다, 위임하다

 

김진선 : 맡기지 않았다 이거지. 그런데 사람한테 맡길 이유가 없지.

 

박중현 : 그러니까 신건선 교우 아니아니 김진선 교우님...

 

김진선 : 김진선, 신건선이 아니고... (폭소) 나한테 자꾸 신건선이래. (웃음)

 

박중현 : 김진선 교우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제자들이 메시아라고 얘기를 하기도 하고 모세가 말한 분이라고, 메시아라고 얘기했지만 정치적 메시아라고 생각했지 우리 죄를 사해주시는 우리들의 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믿었다고 애기했지만 예수님께서 표적을 통해서 어떤 배를 채워 주시는, 그런 세상의 만족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한 것 같다. 표적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니까 자연적으로 신뢰하지 못하신 것 같다.

 

김진선 : 예수님은 자기의 신성을 보여주시려고 기적을 보여 주시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과 이득관계로만 받아들였다.

 

박중현 :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지만 어떤 능력을 행하는 어떤 권능이 있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신뢰하지 못하는 그런 좀 의미가 담겨 있지 않나, 24절에. 그리고 25절에 전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래서 저는 25절에 아무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23, 24절에 주변의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지 못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거기에 관련되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다.

그런데 네 사람이 온다. 첫 번째는 세례 요한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 그게 5장에 나온다. 536절에 보면 33절은 세례 요한이 진리에 대해 증거하신다고 말이 나오고, 36절 같은 경우에는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그러니까 곧 나의 하는 일 나의 하는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해서 증거하신다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표적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아들로 증거하시는 분이라고 얘기하고, 네 번째는 성경, 구약 성경일 것이다. 이 네 가지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한다.

 

장재훈 : 그렇네요? 그걸 어떻게 다 찾으셨나? (웃음)

 

김진선 : 지나가긴 했는데 1절에 사흘과 19절에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는 것이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홍원석 : 제가 찾아봤다. 1절에 사흘째 되는 날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하다. (웃음)

지난 번에 송진업 형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틀, 이틀, 사흘로 해서 안식일과 연결시키는 해석이 있다. 하나님의 안식일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연결시켜서 예수님의 새창조가 시작된다는 해석이 있고, 사흘을 부활의 3일로 연결시키는 사람이 있고, 단순하게 그냥 3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앞에 있었던 일로부터 3일이 지났다는 의미라는 것인데, 그냥 3일이라고 보는 것이 다수설, 앞의 2개는 소수설이더라.

 

김진선 : 나는 세례 받으시고 3일째 되는 날로 봤다. 그런데 19절을 보니 돌아가시고 나서 3일만에 부활하시는 부분과 일부러 요한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결 짓는 것이 아닌가, 이중적인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한 것이다.

 

홍원석 : 자연스러운 것 같다. 사흘째라는 말이 있고,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운다고 했으니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진선 : 그리고 다시 자기가 사흘 만에 부활해서 그 부분을 완성으로.

 

홍원석 : 그런가 하면 송진업 선생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이틀, 이틀, 사흘로 계산해서 7일째니까 안식일과 연결 지어서 예수님의 새창조의 선포, 하나님의 참안식은 새창조니까 그렇게 연결시키는 것도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김진선 :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것과는 조금 먼 것 같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렇게까지는 안나오니까.

 

임상익 : 혹시 24, 25절을 읽고 갑자기 든 교훈이 있는데, 보통 세상적으로 살면 라인 타는 게 중요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맡기면 그런 라인을 탈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교훈을 얻어도 되는 것인가. 그렇게 봐도 되는 것인가.

 

김진선 : 그렇게 생각이 들면 그렇게 하시라. (정애자 교우님을 가리키며) 여기도 라인 전혀 안타고 (웃음) 하나님 라인만 타서 피해 다닌다.

 

홍원석 : 2장 전체를 볼 때 저는 이런 생각이 든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과 성전 청결 사건이 아까 말한 것처럼 메시아적 종말, 메시아의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두 사건인데, 끝에 가서 표징을 보고 믿은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결국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암시한 것 같다. 앞에 19절에서 참 빛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 분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거랑 연결시켜서 메시아가 직접 새 시대를 선포하지만 백성들은 결국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고 계셨기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고 그렇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장재훈 : 진짜 공부할 게 너무 많다. 얘기하다 보니 정말 무궁무진하다.

 

임상익 : 사이즈가 점점 커지고 있다. (웃음)

 

김진선 : 저는 2장을 읽고 또 읽다가 4절에서 큰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카톡에는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굉장히 떨렸다.

 

장재훈 : 김진선 자매랑 저는 실은 에스라에 같이 있어서 어떤 부분은 배운 게 비슷한 부분이 많다. 비슷한 이야기를 늘 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박중현 교우님과 홍원석 교우는 새로운 이야기를 해주시니까 굉장히 풍성해 지는 것 같다. 한 번도 생각 못했던 이야기를 오늘 많이 들었다. 뭐든 배우면 사고가 거기에 잡히기 쉬운데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으니 굉장히 풍성했다.

 

김진선 : 아까 홍 형제가 종말론적 예수님 그 부분 얘기하는 거 두 분 어떻게 알아들으셨나 아니면 나중에 자세하게 조금 얘기를...

 

홍원석 : 어차피 다 카톡에 올릴 것이다. (웃음)

 

임상익 : 청년부에서 예수님의 생애 하고 온 게 참 안타깝다. (웃음) 영화 중간에 들어와서 본 것 같은 느낌. (폭소)

 

장재훈 : 영화 결말만 보면 다 본 것이다. (웃음)

 

임상익 : 얘가 왜 죽었어 뭐 이런 느낌 (웃음)

 

김진선 : 나중에 토의한 거 읽어 보면 1절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초대를 받았고 어머니는 그냥 갔고 그런 얘기도 했다.

 

장재훈 : 그것도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것이었다.

 

김진선 : 성경 공부 배울 때 제일 처음에 이진섭 교수가 뭐라고 했냐 하면 주어 동사를 계속 쓴다. 그러면 내용이 드러난다. 거기는 1절과 2절의 관계를 또 본다. 그럼 엄마는 초대받지 않아도 갔으니까 친척이었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박중현 : 5절하고 하인들에게 말했다는 그 부분에서 감이 왔다. 손님이었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 이렇게 말했다는 것

 

장재훈 : 진짜 좋은 분석이었다. 그것 딱 듣고 깜짝 놀랐다. ‘아 그렇구나.’ 이게 실은 명령을 한다는 게 손님이 갑자기 와서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 잔칫집에서 권한을 부여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오지랖 넓게 왜 포도주 떨어진 것을 얘기하나 싶었고 너무 큰 요구를 왜 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사실은 마리아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굉장히 흐름이 자연스러워진다.

 

박중현 : 카톡에 교제가 더 풍성해지게 하기 위해서 질문을 더 많이 올렸으면 좋겠다. 답은 하지 않더라도 질문을 많이 올렸으면 좋겠다. 그것으로 일주일 동안 계속 생각할 수 있다.

 

장재훈 : 재밌었다. 다 고생하셨다. 정애자 자매님 기도로 마치자.

 

 

 

다음 진도는 3. 3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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