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일 서부광야교회 주일 성경공부 동아리 5회 모임
1) 1절 - 15절
(장재훈 형제님의 개인 사정으로 오늘부터 사회자가 박중현 형제님으로 바뀝니다.)
박중현 : 일단 4장이 54절까지인데 문단을 어떻게들 나누셨나? 나눠주시면 감사하겠다.
우동식 :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사역하신 것이 1절-42절까지이다. 그리고 갈릴리로 가셔서 왕의 관리를 만나신 이야기가 43절-54절까지이다. 이렇게 큰 두 단락으로 나누었다.
박중현 : 두 문단으로 나누신 것인가?
우동식 : 그렇다.
박중현 : 저는 좀 더 자세하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았다.
첫 번째 단락은 1-15절까지로 보고, ‘생수’라는 주제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이루어 졌다. ‘생수와 관련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로 정리해 보았다.
그 다음 16-29절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그리스도로 인식해 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선지자로,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으로 정리했다.
그 다음은 30-38절까지 ‘나의 양식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추수 때 필요한 일꾼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것 같다. ‘예수님의 양식과 추수 때 필요한 일꾼에 대한 설명’으로 정리했다.
그 다음 39-42절로 나눴는데 제가 아침에 전철 타고 오면서 급하게 나눠서 주제를 못 정했다. (웃음) 이것이 네 번째 단락이고, 나머지는 43-54절까지이다. 이것도 급하게 나누느라 주제는 못 정했다.
홍원석 : 저도 우동식 형제님처럼 크게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와 가나에서의 두 번째 표징 이야기로 나눠진다고 보고 42절에서 끊었다. 그런데 42절까지의 내용은 좀 더 세세하게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1-6절은 배경이나 정황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왜 어떤 경로로 사마리아로 들어가셨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7-26절까지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이다.
그 다음에 27-42절까지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이후’로 나누었다. 이 단락들을 더 세부적으로 나눌 수 있겠으나 그건 내용을 나가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송진업 : 저는 크게 세 개로 나누어 보았다. 1, 2절을 하나로 보고, 3-42절까지로 나눴다. 1, 2절은 세례에 얽힌 일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3-42절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또는 ‘사마리아에서 생긴 일’로 정리했다. 43-54절은 ‘왕의 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적’이다.
크게 그렇게 세 단락으로 나누는데, 원래 둘로 나누려다가 1, 2절이 의미있게 읽혀졌다. 3-42절까지는 여러 개의 소단락으로 쪼갤 수 있다. 3-26까지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인데, 3-15절에서는 ‘생수’ 이야기를 한다. 16-19절은 ‘남편’ 이야기를 한다. 20-26절은 ‘예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다음 27-42절은 세 개의 소단락으로 나누었는데 27-30, 31-38, 39-42이다. 27-30절은 제자들 이야기가 끼어든다. 31-38은 추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39-42절에 사마리아에서 이틀 묵으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31-38절이 두 단락 사이에 끼어서 참 양식과 추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뭔가 강조하기 위해 중간에 끼워 넣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까지가 앞 단락이고, 뒤에 왕의 관리 아들 고치신 이야기는 43-46절 상반절까지, 이것이 사마리아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이야기이다. 46하반절-53절까지가 왕의 관리의 아들을 고치신 이야기, 그리고 54절은 두 번째 기적이라고 서술하는 부분이다.
저도 크게 두 개로 할까 세 개로 할까 했는데 결국 세 개로 보게 되었다.
박중현 : 전체적으로 거의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저도 1, 2절이 좀 애매했다.
홍원석 : 저는 1-42절을 그냥 한 덩어리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1, 2절이 다른 내용이라기 보다는 3절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것으로 보여서다. 예수님께서 세례 주시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을 들으시고 피해서 갈릴리로 가시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내용이 연결된다.
송진업 : 따로 뗀 다는 것이 아니다. 이 스토리가 문단을 나누는 데 있어 크게 보면 43절부터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 쪽으로 가면서 사마리아에서 생긴 일들을 작게 작게 자르다 보니까 세례에 관련된 이야기,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생수, 남편, 제자들이 음식 사려 다닌 일 이런 이야기들이 한 덩어리로 봤는데...
박중현 : 내용적으로 보면 1, 2절이 분리된 느낌이 드는데 문맥상으로 볼 때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문단은 거의 비슷하게 나누어진 것 같다.
송진업 : 그런데 1, 2절과 3절의 관계가 그렇다면 문득 드는 질문이 있는데, 결국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시는 것이 피해서 간다는 뉘앙스가 풍긴다.
박중현 : 일단 15절까지 한 단락으로 해서 자유롭게 궁금한 점 있으시면 같이 나눠보도록 하자.
홍원석 : 아직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하고 부딪히면 안되는 상황이다. 때가 아직 안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 많이 하시지 않나. ‘내 때가 아니라’면서 피해가시기도 하고,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그러시기도 하고... 아직 때가 안되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충돌을 피해가시는 것으로 저는 봤다.
박중현 :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귀신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신 것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잠하라 하신 것이다.
홍원석 : 불필요한 충돌이 생기고 일이 커지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안맞으니까 그렇다.
박중현 : 그래서 지금도 3절 같은 경우에 피하는 목적인가.
홍원석 : 그렇게 봐야 되지 않을까.
정애자 : 그리고 1, 2절에 보면 오해를 받으신 것이지 않나. 사실이 아니고 오해니까 그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없으셔서 그런 것일 수 있다.
박중현 : 일단 1, 2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의 경계심이나 시기심이 자극을 받았을 것 같다.
다른 질문인데 여기서 2절 같은 경우는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줬다고 하는데 요한복음 뿐 아니라 다른 공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세례주셨다는 부분이 나오긴 한다. 그렇다면 공관복음에 나와 있는 부분도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 주시지 않고 제자들이 준 것으로 보면 되는 것인가?
송진업 : 공관복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 주었다는 기사가 있나?
박중현 : 있다.
송진업 : 몇 절에 있는가? 요한복음 말고 마태, 마가, 누가 어느 부분인가?
박중현 : 직접적으로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송진업 : 제자들이 세례를 줬다는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는 것 같다.
박중현 : 혹시 4장 2절에 그런 말이 나오나?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셨다고... 그때 민경동 장로님께서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주시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다른 부분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셨다고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송진업 :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닌 것 같으니 넘어 가자. (웃음)
박중현 : 15절까지 주된 내용과 주제를 논의하고 관련된 질문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 다음에 좀 세부적으로 잘 모르는 게 있으면 토의하도록 하자.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 15절까지에서, 주된 주제는 아니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정오에 만났을 때 어떻게 유대 사람인지 바로 알아봤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유대 사람인지 바로 알아봤을까? 유대 사람들의 특징이 있었던 것인지 사소한 부분이지만 한번 얘기 나눠보고 싶었다.
정애자 :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유대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 봤느냐 이 질문이신가? 사투리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홍원석 :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이지 유대 사람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태어나기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혈통상 유다지파이시지만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정애자 : 그런데 사마리아와 완전히 대조해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으로 구별해서.
홍원석 :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이니까 사마리아보다 더 윗 지역 사람이다.
우동식 : 그런데 사마리아는 나라가 북이스라엘에 속해 있었다.
홍원석 : 갈릴리도.
우동식 : 갈릴리도 북이스라엘에 속해 있었나?
송진업 : 사마리아보다 더 위이다.
정애자 : 그런데 사마리아 지역과 유대 지역이 완전히 나눠진 것이 아닌가?
홍원석 : 서로 지역 감정이 엄청나게 세서...
우동식 : 앗시리아에 의해 정복되서 혼혈이 된 것이 사마리아 지역인데 갈릴리도 혼혈이 된 것인가?
송진업 : 갈릴리는 이방의 갈릴리라고 한다.
박중현 : 북이스라엘은 다 그렇다고 보면 된다.
우동식 : 사마리아와 갈릴리가 다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알아봤다. 남유다 사람으로 본 것이다.
홍원석 : 그러니까 그 부분이 이상하다. 혹시 옷이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웃음)
박중현 : 그러면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유대 옷을 입었다는 것인가?
송진업 :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박중현 :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유대 사람이 아니시다.
홍원석 : 갈릴리 사람이다.
송진업 : 제자들도 대개 갈릴리 어부들이거나 그렇다.
홍원석 : 태어나신 곳은 유다 베들레헴이고 유다지파에서 나셨으니까 혈통은 유대인이시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고 주로 사셨으니까 사실상 갈릴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송진업 : 저자의 의도다.
홍원석 :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옷이 좀 다르지 않았을까? (웃음)
송진업 : 여기서 부각시키려는 것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애자 : 사마리아만 완전히 떼어서 하는 것 아닌가?
송진업 :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이 ‘아니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 우리 개 같은 사람과 말을 섞습니까?’ 이런 얘기다.
우동식 : 약간 비아냥 거리는 것이다.
송진업 : 그렇다. 놀랐다는 것이다.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쳐다도 보지 않는다. ‘개’라고 부르지 않나. 심하게 경멸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박중현 : 그것은 나중에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15절까지, 그리고 15절뿐만 아니라 4장의 주된 내용이 저는 ‘하나님의 나라와 생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생수’. 이 생수가 계속 이어지는 주제이다.
우동식 : 제일 중요한 주제이다.
정애자 : 하나님의 선물이 생수이다.
박중현 : 하나님의 선물 그리고 생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이것이 다 똑같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제가 주중에 카톡에 한번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또 예수님께서 생수라는 말을 왜 사용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올렸었고 송진업 교우님과 홍원석 교우님이 답을 올려놓으셨는데, 첫 번째 질문인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성령님이라고 하신 분도 계시고 예수님 자체라고 하신 분도 있었다.
송진업 :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면 예수님도 삼위일체로 보면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다고 할 때 예수님 자체로 저는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은혜는 우리가 잘해서 주는 게 아니지 않나. 예수님 자체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과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군줄 알았더라면 네가 구했을 것이다’에서 ‘선물’이라는 것 자체가 ‘구하면 그가 생수를 주리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은근히 ‘내가 바로 선물’이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선물인 내가 만인에게 생수를 줄 수 있다’ 이런 이야기인 것 같다.
박중현 : 저는 그래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상징적인 의미로 보면 예수님도 될 수 있고 성령님도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상징적인 의미를 떠나서 4장의 문맥 속에서 여인의 구체적 상황에 맞춰 생각해 보았다. 이 당시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었고 지금도 한 사람 있지만 남편이 아니라고 하는 상황인데,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늘 목마르고 갈증을 느끼고 부족한 느낌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상황과 관련해서 선물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그런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남편과의 갈증을 느끼고 부족함을 느끼고 뭔가 그런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정애자 : 그런데 그 남편 이야기보다 앞의 내용을 먼저 하고 하면 안되나?
박중현 :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물’이 무슨 뜻인가를 논의하면서 지금 말한 내용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선물은 그런 남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해방감이라고 해야 되나? 해방감을 줄 수 있는 것이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통해, 말씀을 통해 남편과의 관계는 접어두고, 하나님 안에서의 바른 관계에서 누리는 해방감. 남편들에게서 누릴 수 없었던 해방감, 만족감, 소망, 보호 이런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 당시에 사마리아 여인이 첫 번째 남편과 어떤 관계 속에서 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헤어지고 난 이후 늘 과부로 생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남편의 존재가 참 크다고 봤다.
송진업 : 그런데 남편 이야기까지 나가기 전에 9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자가 ‘왜 유대인인 당신이 나한테 물 달라고 하느냐’ 하고 질문했는데 본문에 그 이유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상종하지 않는다’고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생뚱맞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물 달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면 그에게 구했을 것이고 그러면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아서는 길게 보면 남편 이야기까지 포함이 될 수 있는데...
박중현 :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송진업 :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을 말씀하셨다. 선물과 본인을 말씀하신 것을 봐서는...
박중현 : 그래서 제가 질문하는 것은 그 선물이란 것의 상징적인 의미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다.
우동식 : 저는 그냥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아니고 생수가 선물인 것 같다.
정애자 :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너에게 물을 달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그가 물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가 바로 예수님이고, 생수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10절에 바로 나와있다.
박중현 : 생수와 하나님의 선물은 같은 것 같다.
정애자 : 그렇다.
우동식 :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예수님의 신분을 알았으면 그것을 구했을 것인데 구했으면 예수님이 생수를 너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구하는 게 생수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가 하나님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박중현 : ‘네가 그에게 구했을 것이다’에서 목적어가 빠져 있다. 무엇을 구하는 지가 빠져있다. ‘네가 그에게 무엇을’ 그러니까 목적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그에게 구했으면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봤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가 같은 의미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런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생수’ 또는 ‘하나님의 선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냐 하는 것이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만족을 못하고 있었던 이 여자가 이제 하나님 안에서 만족, 해방, 기쁨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을 저는 하나님의 선물로 보았다.
우동식 : 아 그러니까 선물과 생수가 동일하다고는 생각을 하시는데, 생수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인가?
홍원석 : 생수가 영원한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홍원석, 정애자 : 14절에 나와있다.
홍원석 :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한다’고 되어 있다.
정애자 : 생수는 그 사람 속에서 솟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박중현 : 그런데 이 당시에 영생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남편에게 묶여 있던 데서 벗어나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얘기다.
사람들 : 그렇게 볼 수 있다.
홍원석 : 그렇다. 이 여자가 어떤 정서적, 영적 목마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물을 모티브로 삼아서 ‘네가 남편에게 얻지 못한 정서적, 영적 목마름을 이제 성령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서’ 박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면서 그것에서 목마름이 채워진다’ 이런 의미로 볼 수 있다.
박중현 : 그래서 저도 생수라는 말을 왜 표현했을까...
우동식 : 갈증.
박중현 : 갈증. 그러니까 남편과의 갈증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생수라는 단어를 썼다고 봤다.
우동식 : 남편으로부터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기 때문에, 이 여자는 아마 결혼 생활에 여러번 실패를 했을텐데, 그 당시는 훨씬 더 남편의 중요성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좋은 남편을 맞으면 그런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이 있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생수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물가에서 이야기하신 것이다.
박중현 : 그래서 저도 똑같이 생각했다. 갈증 때문에 생수라는 말을 예수님께서 사용하심으로 여자에게 더 피부로 다가오고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송진업 : 그런데 여기 카톡 질문에 보니까 ‘물, 생수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해서 내가 ‘맞다. 생수를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지’ 이렇게 써놓았다. 그런데 지금 우동식 교우님이 얘기하신 선물이 물이라는 것인가?
우동식, 정애자 : 그렇다. 생수이다.
정애자 : 생수의 설명이 14절에 나와있다.
송진업 : 그런데 내가 혼자 공부하기로는 ‘하나님의 선물’과 ‘물을 달라하는 이’가 같은 것으로 나는 이해가 되었다. 그럼 내가 수정을 해야 되겠다. ‘예수님 자체가 성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큰 선물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가 되었다.
홍원석 : 그것은 맞는 말인데 이 문맥 안에서는 조금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송진업 : 그럼 내가 수정을 해야 되겠다.
홍원석 : 그런데 그렇게 봐도 문제 될 것은 전혀 없다. (웃음)
정애자 : 전체 교리상으로 보면 문제가 없다. (웃음)
홍원석 : 그런데 이제 4장의 문맥 안에서 볼 때는 조금 의미를 좁혀서...
정애자 : 그리고 이 여자가 12시에 규칙적으로 물을 길러 온다. 그런데 윤장로님의 테이프에는 이 12시가 사람들이 많이 물 길러 오는 저녁 6시라고 한다.
홍원석 : 12시가??
박중현 : 6시가 우리 시간으로 12시인가?
우동식 : 첫 시간에 민장로님이 말씀하셨는데 시간 개념에 2가지 설이 있다. 공관복음에는 오전 6시부터 세어 나가서 12시가 되는 것이고, 요한복음은 그런 개념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여섯시일 가능성이 있다는 학설이 있다. 장로님 테이프 들어보니까 요한복음에서는 후자가 더 맞는 것 같다고 그렇게 해석을 하시더라.
정애자 : ‘저녁 6시가 맞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갔다. 먹을 것을 사러 갔는데 그 때 다 낮잠 시간이면 사람들이 안오는 시간에 뭣하러 먹을 것을 사러 갔겠나. 나중에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지 않나. 그럼 분명히 사람이 있었다.’ 윤장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이 여자가 사람들을 피해서 물을 길러 왔다고들 하는데 ‘그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런 걸 잘 아시지 않나. 현재 분명히 혼자 있을 거라던가 혹은 혼자 있을 기회를 가지시려고 이렇게 오실 수도 있으니까.
박중현 : 제가 알고 있는 학설은 보통 플러스 6을 한다. 그런데 다른 학설은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게 지금 여섯 시다. 아침 여섯 시가 아니고 저녁 여섯시인가? 그런데 보통 플러스 6하면 아침 여섯시여야 열두시가 되지 않나. 그런데 저녁 6시에 플러스 6을 하면 그것이...
우동식 : 아니 플러스 6을 하라는 게 아니고, 한 설은 공관복음에서 주로 쓰이는 방식이고 다수설인데 오전 6시부터 하루가 시작이 되는 걸로 봐서 거기에 6을 더하면 12시가 된다는 설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여섯시가 우리가 생각하는 오후 여섯시와 같은 것으로 장로님은 그렇게 해석을 하셨다.
송진업 : 예전에 그런 설교를 많이 들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정오에 와서 몰래 떠갔다는 설교를 늘 들어왔다.
정애자 : 장로님 테이프를 들어보면, 이 여인이 동네로 가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았나. 그러자 그분 한번 만나러 가자고들 하지 않나. 그런 거 보면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짧게 이야기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지만 그래도 말씀 들으니까 내가 옛날에 들었던 설교하고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우동식 : 아주 은혜로운 설교들이었다. 예전에 그 말씀이 은혜로운 말씀이었는데... (웃음)
홍원석 : 저는 다수설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다수설 관점에서 봐야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여자와 둘이 조용히 이야기하시는 게 이해된다. 왜냐하면 이 여자의 아주 내밀한 사생활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사람이 많으면 그런 얘기가 나오기 어렵고...
정애자 :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거 다 조정하실 수 있지 않나. ‘야 오늘은 어쩌다가 혼자 나와 있구나.’ (웃음) 예수님은 늘 기도하고 다니시지 않나.
홍원석 :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먹을 것 사오라고 보내셨는데, 사실 먹을 것 사러는 한 두명만 가도 된다. 그런데 본문에는 다 간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와 일대 일로 대화하시기 위해 호젓한 시간을 만들려고 의도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게 만약 저녁 6시라고 하면 여러 사람들이 물 뜨러 오는 시간이라 조용히 얘기하기가 어렵다. 제자들까지 다 다른 곳으로 보내시면서 여인과 둘이 이야기할 시간을 만드셨는데, 저녁 6시에 예수님께서 물 뜨러 오는 사람들을 초능력적으로 다 막으셔서 그런 상황을 만드신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박중현 : 그런데 목 마른 시간이 있지 않나.
정애자 : 예수님은 물통 안가지고 다니셨나 보다. (웃음)
박중현 : 그러니까 목이 마른 때가 있는데 여섯시 되면 목이.. 정오가 훨씬 더 목이 마르지 않나?
홍원석 : 몇 시가 되었든지 오래 걸으면 목이 마르다. (웃음)
박중현 : 낮에 더우니까 더 목마르지 않을까 (웃음)
홍원석 : 제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와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을 만드시기 위해서 낮 12시를 일부러 택하신 것으로 보인다. 물 뜨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제자들도 전부 먹을 것 사오라고 보내시고, 그리고 이 여자도 마침 이 시간에 물을 뜨러 오고.
송진업 : 그리고 이 상황을 보면 상당히 이상한 얘기다.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가 이야기하는 자체가. 그런데 제자들이 묻는 자가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자체가 획기적인 사건이다.
우동식 : 그렇다.
정애자 : 그래서 윤장로님 테이프를 들어보면 주님을 희미하게 알아가기 때문에 제자들이 ‘주님이 이러신 분이구나. 우리와는 좀 다르구나’ 하고 희미하게 알아가는 거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토를 달지 못한 거라고 했다. 저는 거기에 공감이 갔다.
송진업 : 예수님 제자 중에 마태가 있지 않나. 마태는 세리다. 세리는 그 당시 굉장히 안좋은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홍원석 : 매국노다. 친일파 같은.
송진업 : 그렇다. 매국노다.
정애자 : 예수님은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그런 상식적인 수준의 분이 아니시지 않나.
송진업 : 그런 식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했다고 보면 좋겠다.
우동식 : 이렇게 해석해도 얘기가 되고 저렇게 해석해도 얘기가 된다. 시간 문제는 두가지 설이 다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송진업 :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박중현 : 저는 아까 송진업 형제님이 말씀하신 부분에서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다. 저도 9절과 10절이 뭔가 안맞는닫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가 물은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10절에 직접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을 둘러 가면서 말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바로 말씀해서 알아듣든지 말든지 바로 말씀을 하신다.
송진업 : 예수님께서 다른 복음서에서 ‘선한 선생님이여’ 어쩌구 하니까 ‘왜 나더러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한분 뿐’이라고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듯한 구절들이 있다.
정애자 : 근데 엉뚱한 것 같지만 엉뚱한 게 아니다.
송진업 : 그렇다 엉뚱한 게 아니다.
정애자 : 물이니까 물로 대답하신 것이다. ‘그냥 자연적인 물이 아니다 나는’ 이런 식의.
박중현 : 알아듣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애자 : 당장은 못알아듣는 게 정상이다. 그 다음에 차근차근 말씀하시니까 단계를 하나씩 높여 가며 말씀을 하신다.
(우동식 형제님께 전화가 옴)
홍원석 : 차 빼달라고 하나?
우동식 : 아니다. 여론조사다. (폭소)
송진업 : 나도 몇 통화 받았다. (웃음)
박중현 : 그 때 카톡에 홍원석 형제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요한복음 몇 장인가? 7장이었나?
홍원석 :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얘기한 것이 아니다. 지난 시간에 생수가 예수님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건 아닌데...’ 싶어서 집에 가서 찾아 봤다. 7장에 예수님께서 ‘이 물’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바로 밑에 설명이 나왔다.
박중현 : 그래서 그것이 7장 몇절인가?
송진업 : 7장 38, 39다.
박중현 : 그래서 저도 찾아봤다.
정애자 : 그런데 ‘물은 성령’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게 훨씬 더 표현이 좋은 것 같다.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다. 이게.
홍원석 : 그런데 38-39절에 보면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라고 되어 있다.
박중현 : 그런데 그것이 괄호 쳐져 있나?
우동식 : 괄호 쳐져 있지 않다.
홍원석 : 괄호는 그 밑에 ‘그때까지 성령이 오시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에 쳐져 있다. 그것은 지금 관계 없는 부분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39절 상반절이다. ‘이것(물)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이것이 위에 말한 생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 것이다.
박중현 : 제가 괄호를 유심히 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때는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이후라는 조건이 있는 것 같았다.
홍원석 :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으로 오시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박중현 : 그렇다. 그럼 이때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께서 대화를 하셨을 때는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이전이다. 그러면 물론 구약 시대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있었지만...
송진업 : 20장 21절을 한번 보시라. 제가 한번 읽어 보겠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여기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기 전에 그 앞에 평강을 이야기한다.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인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다.
부활하시고 나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요한복음의 문맥으로 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타나신 것은 영광을 받으신 후의 일이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누구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시는 말씀으로 봤을 때 이걸 한번 생각을 해보면 ‘내 때가 안됐다, 안됐다’ 하는 것이 그런 측면에서 얘기를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 7장에서 얘기하는 성령이 38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생수의 강이 넘쳐 흘러나리라’ 하는 얘기를 그렇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괄호 쳐놓고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셔서 성령이 저희와 계시지 않았다’ 하는 얘기를 지금 방금 20:21에서 얘기한 걸 그렇게 받아들여서 해석을 하면 어떨까 싶다.
박중현 : 제가 묻고자 하는 요지는,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 난 이후에 받게 될 성령인데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성령으로 직접적으로 연관시켜야 하나 그런 생각을 좀 해봤다.
송진업 : 카톡에서 얘기한 게 그게 아니라고 지금 홍 형제가 얘기한 것이다.
박중현 : 하나님의 선물하고 성령하고 같이...
홍원석 : 하나님의 선물은 성령이라기 보다 성령을 통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14절에 나왔다.
우동식 : 그렇게 이해하는 게 맞다.
박중현 : 제가 약간 잘못 이해를 한 것 같다.
홍원석 : 그런데 제가 이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해석들을 찾아보니까 학자들이 설이 많다. 이것이 난제다. (웃음) 난제는 우리가 덮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끼리 열심히 얘기해도 답이 안나온다.
정애자 : 선물의 의미를 다른 구절에서 찾아오지 않고 이 안에서 하는 게 쉽지 않나, 당장은. (웃음)
사람들 : 14절의 영원한 생명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박중현 : 집에서 나오기 전에 CBS 방송을 들었는데 그분이 요한복음 4:10의 생수를 ‘말씀’으로 얘기하셨다. (웃음)
홍원석 : 그건 말이 안된다. (웃음)
정애자 : 그렇다. 그냥 이 문맥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제일 좋다. 이거 하기도 벅찬데 다른 것까지 끌어들이면 안된다. (웃음)
박중현 : 그래서 저는 그렇게 봤다. 선물하고 생수의 의미를 사마리아 여인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그 여인에게 진짜 필요한 선물이 뭔지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해석이 되었다.
홍원석 : 그런데 그렇게 보면 너무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적용시키는 게 된다. 예수님께서 사실 사마리아 여인이든,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든 특정 그룹의 대표로 놓고 이야기하시는 것이지 그 사람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마리아 여인도 목마른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대표로 봐야지, 그 여인의 구체적인 문제에 너무 집중하면 해석이 좀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다.
재밌는 것은 3장의 니고데모는 유대 사람이고 4장에서 사마리아 여자가 나오고 그 다음 그 밑에 이방 사람인 왕의 관리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그런 식으로 순서대로 만나신다. 유대 사람, 사마리아 사람, 이방 사람 이렇게 순서대로. 그래서 각각의 대표 선수들이 나오는 것이다.저는 그렇게 봤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순서와 같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한 구절과 같은 순서다.
송진업 : 그거 좋다.
홍원석 : 우동식 형제님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웃음)
우동식 : 처음 듣는 신선한 얘기다. (웃음) 유대, 사마리아, 이방인.
홍원석 : 그래서 사실 3장에서 니고데모와 대화하실 때도 ‘너’라고 하셨다가 ‘너희’라고 하셨다가 ‘나’라고 하셨다가 ‘우리’라고 하시면서 표현을 바꾸시는 것을 보면 대표 선수를 놓고 얘기하시는 것이 드러난다. 니고데모는 영적인 어둠 속에서 메시아가 오셨는 데도 그를 알아 보지 못하는 유대 사람들의 대표 선수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다. 영적으로 목말라 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대표 선수.
박중현 : 그렇다. 사마리아인을 대표로 해서 목마른 사람들을 대표로 하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송진업 : 이방인은 누군가?
홍원석 : 왕의 관리.
박중현 : 그렇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목말라 하는 사람의 대표로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킨 것이다.
홍원석 : 하나님으로 그 목마름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을 딴 데서 찾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 선수로 사마리아 여자가 나오는 것 같다.
박중현 : 저는 몇 주 전에 집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제가 다루고 싶었던 점을 해결해 주지 않더라. 우리 집사람이. (웃음) 그래서 힘들었었다.
정애자 : 아내와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충족하지 못하셨구나. (웃음)
박중현 : 충족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정애자 : 참 아직도 낭만적이시다. (대폭소)
박중현 : 그런데 이 말씀 딱 보면서 ‘아 이거구나. 내가 하나님의 선물을 추구해야지, 생수를 추구해야지. 우리 집사람과의 관계에서 추구해서는 안되는 구나. 그래서 문제가 있구나. 우리 집 사람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선물을 추구하고 받음으로써 해결해야 겠다’ 라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저는 그때 이 말씀이 너무 좋았다.
2) 16절 - 26절
우동식 : 16절로 넘어가시자. 그 다음 절로.
정애자 : 그런데 아까 홍원석 형제가 말한 것처럼 이 여자는 대표가 되기에 너무 적절한 여자다. (웃음)
홍원석 : 사실 니고데모도 대표로 나오기 딱 좋은 사람이다.
정애자 : 우리 나라의 설악산에서 만난 여자 이러면 물이 너무 많다. 물을 제 시간에 안길어도 언제든지 물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는 이 시간에만 또 물을 길어야 되는 걸 보면 정말 대표 선수로서 마땅하다. (웃음)
송진업 : 16절로 넘어간 것인가?
정애자 : 넘어가고 싶은 것이다. (웃음)
박중현 : 더 얘기할 게 있으시면 더 얘기해 주시고 없으면 넘어가자.
송진업 : 넘어가시자. 16절 이후에 박중현 교우가 질문을 많이 하셨다.
홍원석 : 그 전에 13, 14절에서 말하는 ‘물이 성령이다’ 하는 것은 아까의 7장 39절을 봤을 때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주는 물이 성령’이고, 그 성령을 우리가 받을 때, 즉 성령으로 다시 태어날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장과도 주제가 연결된다.
2장에서도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시니까 그가 이해를 못했다. 사실 14절에서 예수님께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 3장은 ‘성령’이라는 주제가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여자는 못알아 듣고 ‘그 물 주시면 다시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반응한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느냐’고 한 것과 비슷한 반응이다. 그래도 이 여자에게 일어난 괄목할 만한 변화는 물을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는 것이다.
정애자 : 그래서 15절에도 ‘그 물’을 달라고 하지 않나. ‘이 물’이 아니고 ‘그 물’. (웃음)
박중현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핵심 포인트인 것 같다. 이것만 해결이 되면 모든 게 해결이 되는데 이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과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계속 이상한 말을 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임상익 교우가 얘기했나, 여자가 ‘주’로 시인하게 되었는데 왜 갑자기 ‘주’로 시인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제가 임상익 교우에게 카톡으로 대답해 줬는데 KJV나 다른 번역본에 보면 ‘주’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얘기하신 것이라고, 그래서 신분상 주인으로의 의미가 아니라 높여주는 존대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선생님’으로 말했다가 조금 후에 자기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까 ‘선지자’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그리스도로 알게 된다.
홍원석 : 그래서 아까 송진업 형제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생수 메시지-남편 메시지-예배 메시지로 나누시지 않으셨나. 그게 정말 일리 있었다. 그런데 저는 좀 다른 측면에서 사마리아 여자 중심으로 보면, 이 여자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그냥 ‘유대 남정네’로 봤다가, 남편 얘기하니까 ‘예언자’로 봤다가, 그 다음에 ‘메시아’로 보게 된다. 그런 인식의 발전 과정이 나타난다. 자연인 유대 남자에서 예언자로 그 다음에 메시아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다. 여자가 점점 깨달아 가는 것이다. 생수-남편-예배 이렇게 메시지 중심으로 나누는 것도 아주 좋은데, 자연인-예언자-메시아 이렇게 여인의 인식의 변화를 기준으로 나누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정애자 : 그러니까 지금 15절까지에서도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못알아 본 것이다. 그런데 뭔가 좀 다르다. 이제 다른 점을 또 다시 예수님이 부족한 면을 찌르시는 것이다, 16절부터는.
박중현 : 그럼 16절부터 29절까지 생각이나 질문하실 것 있으면 말씀해 주시라.
정애자 : 19절까지 먼저 하고 넘어가면 안되겠나.
홍원석 : 19절까지가 ‘당신 예언자군요’ 하면서 여자의 인식이 딱 바뀌는 부분이다.
박중현 : 그럼 19절까지 한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홍원석 : 그런데 이미 얘기가 다 나온 것 같다. (웃음) 사실 예수님께서 뜬금없이 갑자기 ‘남편 데리고 와’ 하는 이야기를 하신 것은 이 여자의 목마름의 핵심이 남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딱 집어내신 것이니까...
정애자 : 그래서 물하고 연관을 시키신 것이다.
박중현 : 10절에 말한 것처럼 16절에서도 바로 이렇게 군더더기없이 바로 핵심이 되는 그 부분을 말씀하셨다.
홍원석 : ‘너 목마르지? 사실 남편 때문에 목마르잖아’ 하시면서 핵심을 찌르신다.
박중현 : 그래서 남편 불러 오라고 얘기하셨다.
홍원석 : 그럼 지금 함께 사는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는 말은 뭘까? 이 시대에 동거가 있나? (웃음)
정애자 : 그러게.
박중현 : 그래서 저도 궁금했다. 분명히 남편이 있는데 남편이 없다는 말에 공감해 주셨다.
송진업 : ‘있지만 실제로 네 남편이 아니다’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참 남편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이거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인가?
홍원석 : 그건 너무... (웃음)
정애자 : 수준이 너무 높으시다. (웃음)
박중현 : 이것과 관련해서 전 남편이 다섯 명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 다섯 명은 죽은 건지 아니면 살아 있는 건지 궁금했다.
홍원석 : 다섯 명이 다 죽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웃음)
송진업 :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계시니까 여자가 놀란다. 나다나엘도 마찬가지로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걸 봤다’ 하니까 ‘아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하고 고백을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 것이다.
홍원석 : 저는 이 여인의 심리를 생각해 봤을 때 여인이 남편을 통해서 영적, 정서적 갈증을 채우고 싶었는데 여섯 번째 남편에게서도 못채우니까 사실은 남편인데, 남편이 아니라고 얘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여자의 목마름과 남편의 관계를 아셨기 때문에 ‘그래 맞다. 남편 아니다’라고 공감해 주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다.
박중현 :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다.
우동식 : 저는 반대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앞에 채워주지 못한 다섯 사람은 남편이라고 하셨다. ‘남편 다섯이 있었다’ 했으니까 채워주지 못했다고 해서 남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비합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 (웃음)
홍원석 : 저는 왜 그러게 보냐하면 18절에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앞의 다섯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
송진업 :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을까 이런 걸 보면 지금 같이 사는 남편도 남편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남편 누군가가 있을 게 아닌가. 그게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다. (웃음)
홍원석 : 그거는 맞는데...
(웃음)
박중현 : 의견은 맞는 것 같다.
홍원석 : 그렇게 크게 보면 맞는데 4장의 문맥 안에서는 그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정애자 : 그런데 왜 여기서 불러 오라고 하나? ‘너 남편 있지?’ 이러지 않고. ‘너 남편 불러와’ 이렇게 하는 게 특이하다.
송진업 : 여자의 고백을 듣고 싶으신 것이다.
우동식 : 그렇다. 여자의 약점을 찌른 것이다. 그런 것으로 보면 이 다섯 번째 남편은 불러올 수 없는 사람이다. 비합법적인 사람이다.
박중현 : 처음에 저도 홍원석 형제처럼 생각했었는데 우리가 흔히 그런 말 하지 않나. ‘있으나 마나 하다’ 하는 식으로 비아냥 거리는 표현을 쓴다. 그래서 저도 쉽게 말해 남편 역할을 다 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남편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주석을 찾아 보니 FF 브루스의 글에 의하면 이 관계에 법적인 하자가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정애자 : 아 그러니까 불러오라고 하지만 불러올 수가 없다 이건가. 너무 맞는 말이다.
박중현 : 불러올 수가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남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홍원석 : 그럼 동거하는 중인가? 이 시대에 돌 맞아 죽을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웃음)
이 시대에는 그렇게 하면 돌 맞아 죽잖나.
박중현 : 그래서 저도 우동식 형제님처럼 남편이 있긴 있는데 그게 법적으로 인정받은 남편은 아니라서 불러 올 수 없다고 봤다. 법적으로 하자가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우동식 : 영어 성경이 한글 성경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로는 그냥 ‘그 사람도’ 라는 표현은 없다.
사람들 : (공감하며) 아~ 그런가.
우동식 : And the one you now have is not your husband. 이렇게 and로 연결이 되어 있다.
박중현 : 그래서 19절에 선지자라고 고백을 했다.
홍원석 : 인식이 바뀐 것이다.
박중현 : 송진업 형제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에 로마 군병들에게 고난 받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그 중에 하나가 눈 가리고 때리면서 ‘네가 선지자면 누가 때리는 지 맞춰 보라’는 그런 식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과 연관시켜서 이때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알았다는 것이다. 알 정도라면 ‘분명히 선지자이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서, 이 선지자라는 말이 이 사마리아 여인의 고백을 통해서 나왔던게 아닌가 자기 과거를 아니까.
홍원석 : 다음은 20절부터 메시아 얘기가 나오는 26절까지 보면 될 것 같다.
박중현 : 메시아에 관련된 내용으로 26절까지 한번 살펴보겠다.
송진업 : 그런데 20절에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다’고 하는데 그 산이 그리심 산이라는 것은 카톡에 올라와서 다 알았다. 그런데 여기 이제 ‘사마리아 조상들은 여기에서 예배를 했고’라고 하고 12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자도 ‘우리 조상 야곱’을 고백한다.
사마리아 여자가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줬다’고 한다. 그러면서 20절에 ‘우리 조상들은’ 하면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사실 이들도 야곱의 뿌리다. 왜냐하면 솔로몬 이후에 남북이 갈라졌으니까.
홍원석 : 그 부분에 대해서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수가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고 되어 있는데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라는 표현은 사실 필요 없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집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물도 하필이면 ‘야곱’의 우물이다.
그래서 제가 볼 때 유대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굉장히 비하하는데 이 본문에서 사도 요한의 의도는 그걸 약간 반박하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의 땅이다’라는 뉘앙스가 좀 느껴진다. 사마리아도 야곱, 요셉 등 조상들의 땅이고 ‘거기에 야곱의 우물도 있다’ 라고 일부러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송진업 : 그리고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내려와서 첫 땅이 세겜이다. 세겜이 사마리아에 바로 붙어 있는 곳이 아닌가. 야곱이 외삼촌에게 쫓겨 올 때도 얍복강 건너서 세겜에 머무른다. 그래서 세겜이 사마리아의 중요한 지역이긴 한데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자가 ‘우리도 이렇다면서’ 종교적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너희 유대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에만 얘배 처소가 있냐 여기도 있다’ 그런 느낌이 있다.
우동식 : 여기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할 곳, 장소를 가지고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서로 정통이라고 다투고 있는 것을 가지고 얘기를 한다. ‘장소’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데 예수님은 ‘때’를 가지고 전환을 시켜 주는 게 재미있는 부분이다.
홍원석 : 예수님께서 22절에서 그리심산 예배의 신앙적 전통은 잘못된 거라고 부정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게 맞긴 맞다. 그렇지만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 드릴 때가 왔다.’ 하시면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옛 패러다임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심 산이 맞냐 예루살렘이 맞냐’ 이런.
송진업 : 그런데 그 때라는 게 2장에도 나왔다. 어머니에게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는 그런 뉘앙스가 다 포함된 것 같다.
우동식 : 이 ‘때’를 뒤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결국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 그러니까 진리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예배하는 것,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홍원석 : 흥미로운 점은 21절에 보면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라고 하신다. 사실 구약의 예배 개념은 아버지 개념이 아직 아니다. 여기서 ‘아버지께 예배 드린다’는 개념도 이 시대에서는 혁신적인 개념이다.
우동식 : 구약에서는 아버지라고까지는 하지 않나?
홍원석 : 그렇다.
송진업 : 여호와라는 이름도 제대로 못불렀던 시대다.
홍원석 : 왕이신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해서 예배의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시면서 22절에서 ‘어쨌든 사마리아의 예배는 잘못된 거’라고 하신다. 알지도 못하면서 예배드렸다는 것이다.
정애자 : 알지도 못했다. 예배 대상도 잘 몰랐다는 것이다.
박중현 : 임상익 형제가 카톡방에 올린 게 있었는데, 22절의 말씀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올렸던 것 같다.
홍원석 : 사마리아의 신앙 전통은 혼합주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사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방 종교와 섞여서. 그나마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 신앙의 전통을 잘 지켰으니까 그 부분을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그것도 이제 지나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박중현 : 그래서 22절에 임상익 형제가 올려놓은 것을 제 나름대로 답변을 올렸는데...
송진업 : 제가 임상익 형제의 질문을 읽어 보겠다. “배경주석에서는 예수님이 중립적이셨다기 보다는 이 구절을 통해서 유대인 편이셨다라고 나와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뜻일까요? 관주를 찾아보니까 이방신을 예배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나와있습니다만, 정말 중립적이지 않으셨다고 봐도 될까요?”
임상익 형제가 와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겠지만 읽어보니 알 것 같기도 한다. 거기에 댓글로 박중현 형제가 답을 달아 주셨는데, “사마리아인이 속한 북이스라엘은 예배 드리는 시작 그 자체부터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은 곳과 (왕상 11) 베델과 단, 금 송아지를 두고 예배를 드렸기에 앞으로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북이스라엘은 그 이후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마게도냐의 지배 하에 다른 이방신의 영향도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원석 : 아주 잘 답변을 해주셨다.
송진업 : 나도 이것을 읽고 동의가 되었다. “오랫동안 이런 영향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예배 장소나 성경의 범위 즉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 경전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특히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그들 방식으로 드렸던 예배는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굉장히 좋은 답변을 주셨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본문만 읽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정애자 : 그럼 22절 후반절에서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난다고 했는데 이 말이 그럼 메시아를 뜻하는 것인가? 그런데 왜 복수를 썼을까? 유대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다.
송진업 : 그런데 개역한글에는 그냥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해서 단수로 되어 있다.
홍원석 : (베들레헴을 보며) 보니까 개역한글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복수로 나온다. 현대인의 성경과 공동번역은 단수로 나온다.
송진업 : 22-26절까지 보면 결론적으로 “내가 그다.”라고 얘기하는 거 보면 그가 유대인이지 않나.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않는다는 문맥의 흐름으로 본다면 메시아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정애자 : 저도 무시하려고 했는데 복수라서, 무슨 엄청난 의미가 있나 해서. (웃음)
홍원석 :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신앙 자체가 혼합주의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송진업 : 사마리아인들이 자꾸 여로보암 시대인가? 자꾸 예루살렘으로 예배 드리러 올라가니까 단을 세우지 않나. 그리고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을 세운다. 그래서 율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십계명도 다른 것을 갖고 있다고 한다. 1계명과 2계명을 더해서 사마리아 경에서는 1계명으로 하고 우리가 말하는 3계명이 사마리아경에서는 2계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석이 틀리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하도 오래 전에 들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렇게 썼다고 한다. 십계명의 해석이 틀리다고 한다. 그러니까 뭔가 자기들이 유리하게 옹호하려고 그랬다는데 중요하지는 않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갈등은 있었던 것이다. 신앙적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홍원석 :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가 맞다고 하셨다. 유다의 신앙전통이 맞다고 하신 것이다.
송진업 : 메시아가 유대에서 온다는 것이다.
홍원석 : 사마리아 전통은 혼합주의로 갔기 때문에 구원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온다는 의미도 함께 같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래서 페르시아로부터 귀환할 때도 유다만 얘기한다. 사마리아인들은 적수, 원수로 묘사된다. 사마리아인들은 배제된 것 같다. 그때부터 배제된 것이 아닐까,
송진업 : 산발랏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방해를 한다.
홍원석 : 그래서 어떻게 보면 북왕국이 망하면서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은 구원에서 배제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송진업 :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망하면서 고산 지대로 강제로 흩어졌다. 민족말살 정책을 앗수르가 지독하게 했다. 그래도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는 유화정책을 썼는데 앗수르는 달랐다.
홍원석 : 그래서 느헤미야에 보면 성전을 다시 세울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우리도 돕겠다’ 하니까 ‘너희와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한다.
송진업 : 그러니까 개 취급을 한 것이다.
홍원석 : 개 취급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흐름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송진업 :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새로운 선포를 하신다. 생수 얘기하시면서 뒤에 나오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 얘기 들어보니까 메시아시다 하고 고백도 하지 않나.
정애자 : 사마리아 여인은 그래도 뭘 알지 않나. 그래도 뭔가 좀 남아있긴 남아 있는 게 아니었을까? 하나님은 늘 몇 명 남겨놓으신다.
홍원석 : 그런 역사적인 부분들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주로 북쪽의 갈릴리에서 사시고 활동하셨던 것도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송진업 : 넘어가기 전에 한가지만 더 생각을 좀 해봤으면 좋겠다.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23, 24절에서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찾으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들의 일상적인 말로 좀 얘기해 봤으면 좋겠다.
박중현 : 저도 그게 궁금했었다. 사마리아는 참 다행인 것이 장소가 중요한 것이라면 사마리아는 예배드리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런데 다행히 장소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때’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때’가 어떤 ‘때’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때’라고 하시고 장소에 상관없이 사마리아인들도 이제 옳은 예배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이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의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 것인지 좀 생각해 봤다.
로마서 12:1, 2에 보면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신령과 진정을 영적인 예배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보면...
송진업 : 예수님께서 이거 해결해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도 예루살렘에 한번씩 가서 예배드려야 된다. (웃음)
우동식 : 지금 이슬람 교인들이 메카에 가서 하듯이.. (웃음)
홍원석 : 그런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 할 때 ‘신령과 진정’이란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신령’이란 단어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준다. ‘신령님’이란 단어를 연상시킨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표현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영과 진리’라고 할 때 영은 성령이다. 그런데 16장 13절에 보면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성령 곧 진리라고 하는 교수님도 계시더라. 한마디로 성령 안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이다. 그런 견해가 있다.
송진업 : 영이라는 것은 성령님이신데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윤장로님 로마서를 듣다 보니까 사람에게 영이 있지 않나. 로마서 8장에 나와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사람의 영이 타락한 영, 더러운 영도 있고 깨끗한 영도 있을 텐데 그 영이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이 새롭게 변화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듯이. 그런 표현이 아닌가 싶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그 자체도 그리스도를 만나서 새롭게 변화된 영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그런 의미가 아닌가 한다.
홍원석 :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영과 진리’라고 했을 때 ‘영’은 성령이시다. ‘진리’는 예수님이시다. ‘내가 곧 진리’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와 연결시켜보면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된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이미 찢어져 버린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릴 때가 온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이것은 새시대 즉 신약 시대의 도래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필요가 없고, 성령을 통해 진리이신 예수님을 깨닫고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의미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다. 그래서 메시아 도래로 인한 예배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정애자 : 장소가 아니라 성령과 예수님 안에서 드리면 그것이 다 예배다 이런 의미다. 그러니까 이제 장소는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교회 건물도 아니다.
송진업 :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홍원석 : 메시아적 종말의 새시대가 도래한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송진업 : 안그러면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
우동식 : 홍원석 형제의 해석에 한표. (웃음)
송진업, 정애자 : 저도 (웃음)
우동식 : 전에는 ‘영과 진리’라 하면, 영어 성경에는 in spirit으로 되어 있는데, 변화된 우리의 영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것과 24절을 비교해 보니까,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표현으로 보면 ‘God is spirit’으로 하나님을 영이라고 하고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라고 되어 있다. 영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예배를 해야 한다는 표현이다. 영어로 보면 그렇게 해석이 된다. 영은 성령이라고 보면 된다. in spirit 하나님의 영 안에서 in truth 진리 즉 예수님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석이 된다. 24절하고 연결을 시키니까 그렇게 보인다.
송진업 : 24절의 전제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면서... 그런데 왜 ‘신령’이라고 번역을 해가지고..
홍원석 : 그렇다. 아주 잘못된 번역이다. 메시아가 오심으로서 예배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어서 이제는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배드려야 되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이미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다.
우동식 : 그땐 그렇지 않았을까. 옛날 시대이다 보니까 Holy Spirit을 ‘신령’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성령을 생각하면서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약간 좀 의역을 하면서 ‘신령’이라는 단어를 택한 것 같다. 그런데 결국 해석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이럴 것 같다.
박중현 : 구원 사건 이후에 성령님에 의해서 예수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
정애자 :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하나씩 깨가고 계시다. (웃음)
박중현 : 그래서 여인이 19절에 선지자라고 고백했던 이유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알아맞혔기 때문이고, 20절에서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드리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린다고 예수님께 질문하는 이유는 선지자로서 충분히 예배 장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얘기해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 같다.
우동식 : 논란이 있는데 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입니까? 이렇게.
박중현 : 그렇게 한 다음에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예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려야 한다는 예배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니까,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선지자 외에는 없다고 인식을 하고 29절에서 고백을 하는 것 같다.
정애자 : 그런데 21절에서도 참 재밌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하셨다. ‘내 말 들어라’가 아니고 ‘내 말을 믿어라. 네가 말하는 게 장소가 아니고 때다.’. ‘믿어라’는 표현도 상당히 흥미롭다. 메시아적인 표현인 것 같다.
박중현 : 믿으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은 메시아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사람이 이렇게 말하기는 좀 건방지고. (웃음)
홍원석 : 사실 우리는 이미 신약 시대에 살며 누리고 있어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이 새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도 되지 않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이다. 기존 종교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우린 이미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너무 당연하게 드리고 있어서 그렇다.
박중현 : 일단 26절까지 했으니까 다시 더 말씀하신 부분이 있으신가? 없으면 넘어가도록 하자.
3) 26-42절
송진업 : 제자들이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을 텐데 묻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스승님이 사마리아 여자하고 얘기를 하신단 말인가?’ 하는 것이 깔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어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니까 여자가 동네로 가서 자신의 얘기를 하고 동네 사람들이 30절에 오게 되고 39절에 사마리아 여자가 다시 자기가 행한 바를 얘기하자 동네 사람들이 믿는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는 지는 모르겠는데 40절 이후에 예수님께 묵어 가시라고 청하고 예수님께서 이틀간 묵으셨다. 묵으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하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여자에게 ‘당신이 얘기한 거 말고, 이 사람 얘기 들어보니까 진짜 메시아신지 알겠다’ 고 한다.
그런데 중간에 끼인 31-38이 참 양식과 추수 얘기를 한다. 이것이 굉장히 핵심적인 얘기인 것 같다. 지금 사마리아를 구출하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너희들이 이들을 개 취급하지 말고 추수에 나서라. 이들도 추수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다.
정애자 : 아까 홍원석 형제가 말한 것처럼 5, 6절에서 굳이 ‘야곱의 아들에게 준’ 이란 표현이 들어간 것을 여기에 연결시키면 될 것 같다.
홍원석 : 28절이 좀 의미심장한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간다. 요한이 문학적 장치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물동이를 버린 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이 여자가 갖고 있던 물동이는 마셔도 또 목마른 물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이 물은 야곱의 우물에서 뜨는 물이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물, 이것은 남편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을 내려놓고, 또 ‘야곱의 우물’로 상징되는 사마리아 종교 전통도 버려버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요한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박중현 :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다.
홍원석 : 그렇다. 옛것을 버리고 자기가 메여 있던 것을 다 내려놓은 후 메시아를 받아들인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저자 요한이 이런 상징적 표현을 즐겨 쓴다. 2장에서도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든지 하는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요한이 2-4장에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변화라는 주제를 끌고 가고 있다. 메시아가 오셨으니 새시대가 도래해 모든 것이 변화했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정애자 :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홍원석 : 물 모티브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물동이를 버린 것이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박중현 : 버려둔다는 말은 정리가 된 마음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동식 : 허겁지겁 갔다거나, 예수님께서 딴 데로 가시기 전에 동네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이런 의미로도 볼 수 있겠다.
홍원석 : 요한이 문학적 장치를 많이 집어 넣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어찌 보면 ‘마음이 급하니까 버려두고 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굳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라는 표현을 써놓은 것이 물 모티브 속에서 의미심장하게 보여진다.
박중현 : 그렇다. 확실한 확신과 기쁨이 없으면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홍원석 : 그런데 29절에 보면 그렇게 또 메시아로 확신한 것 같지가 않다. 그렇지 않나?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하면서 뭔가 자신 없는 말투를 쓴다.
정애자 : 이렇게 알려줘도 여인이 금방 못깨닫는 것이다.
우동식 : 한국말로는 반어법적으로 생각했는데 영어로 보니까 뉘앙스가 약하다. Could this be the Christ? 약간 약한 표현이다. 아니지 않을까 하며 약하게 반문을 하는데 확신을 가진 표현이 아니다.
박중현 : 그럼 28절의 버려두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홍원석 : 옛것을 버렸지만 아직 완전히 믿음으로 돌아선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애자 : 바로 되지 않는다. 하루 아침에 안된다. (웃음)
홍원석 :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이 메시아라고까지 하셨는데도 여자가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믿음은 생겼는데, 니고데모도 그렇고 뒤로 갈수록 믿음이 생긴다.
박중현 : 인정은 한 것 같다. 사마리아 여인이 장소와 관련 되서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네들이 계속 기대했던 그분으로 인정은 한 것 같다.
정애자 : 그런데 30절에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을 보면 뭔가 그래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한 것 같다. 깊이 있게 말도 했을 것이다. 이전에 설교 들을 때는 이 사마리아 여인이 너무나 시시껄렁한 여자로 묘사되었는데, 사실은 상당히 영향력을 끼치는 유력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가 오라니까 다 오지 않나. 동네 사람들이 여자의 말을 듣고 오는 것을 보면 나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박중현 : 남편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을 지도... (웃음)
우동식 : 완전히 무시받고 천대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한 말을 동네 사람들이 듣고서 공감을 하고 믿고 따라온 것이 아닌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박중현 : 39절에서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이 한 말을 통해서 믿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예수님을 요청해서 며칠 간 같이 있으면서 ‘너한테서 듣고 믿은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는 전에 금요일에 얘기한 것 같은데, 지난 주 설교 말씀이 누가복음 24장이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속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저녁에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다. 나타나셔서 ‘선지자의 말을 왜 더디 믿느냐’고 하시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 성경에서 나를 가리켜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여기서 어떤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하나도 없다. 말씀만으로 잘 얘기해서 깨닫게 해주고 그래서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엠마오 사건 속에서도 물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나 베드로에게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심으로 부활했다는 기쁨은 있었지만, 성경을 확실하게 믿지 못했을 때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버리고 나중에 성령님에 의해서 확실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깨달은 이후에야 확실하게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로 되는 것처럼 저는 24-29절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할지 생각해 봤다.
암 걸린 사람들의 삶 같은 경우는 병을 고쳐주면 믿겠다고 얘기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지옥에 간 부자와 나사로 얘기에서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가면 믿을 거라고 하지만 말씀을 안믿으면 안된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저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상익 형제 들어옴)
송진업 : 그러면 이틀 머무시면서 예수님이 말씀을 나누신 게 성경을 주로 풀어서 설명을 해주셨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다.
정애자 : 그런 것 같다. 말씀을 직접 들어봤다고 했으니까.
박중현 : 그 말씀이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말씀들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고.
송진업 : 26절에 사마리아 여자에게 얘기했듯이, ‘그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아 세상의 구주구나’.
박중현 : 그러니까 저는 진정한 믿음은 말씀을 깨닫고 말씀에 의해서 믿었을 때 확실한 믿음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정애자 : 그런데 이분들도 준비가 되지 않았나? 한 여자가 ‘그 사람이 내 과거 다 알고 있다’고 하니까 바로 여기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 않나. 물론 이 사람들이 다 소문은 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니까 ‘구주시다.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다’ 이러는 거 보면 그들 가운데 준비되고 믿는 사람들이 사마리아에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홍원석 : 31절부터 먼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 만나서 대화하신 것과 사마리아 사람들 만나서 이틀 동안 대화하신 것이 다 결국 추수다. 연관이 되기 때문에 같이 보는 게 좋을 듯 하다. 31절이 사실 굉장히 중요한 주제가 있는 것 같다.
박중현 : 31절 한번 읽어 주시라.
송진업 : 읽기 전에 상익 형제 지금 왔으니까 설명을 좀 해주자. 상익 형제 27절부터 42절까지 보는데 27절부터 30절까지가 사마리아인 관련된 이야기고 39절도 사마리아 관련된 이야기다. 그런데 중간에 31-38절까지가 뭔가 끼인 이야기인 것 같아서 우리가 살펴 보고 있다. 그게 뭐냐하면 참된 양식이 뭐냐, 추수하는 것이다. 사마리아는 별로 우리가 안중요하게 봤는데 ‘그들도 우리가 추수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이런 얘기가 오고갔다. 31절부터 38절까지 굉장히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제자들이 와서 36절에 ‘랍비여’ 하면서 랍비는 선생님이란 뜻이다. 음식을 사왔나 본데,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 양식이 있다’ 하시니까 ‘아 누가 드실 것을 갖다 드렸나’ 하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다른 게 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고 하셨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뒤에 나오는 추수의 이야기다. 뿌리는 자도 있고 거두는 자도 있는데 ‘너희는 거두는 자니까 그냥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신 것 같다. 구약까지 다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미 구약에선 다 뿌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상익 : 그럼 38절에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에 참여했다’ 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좀 궁금했다.
송진업 :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자들이다. 야곱이든.
홍원석 : 가까이는 세례 요한이고 그 앞으로 죽 있는 선지자들.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고 준비한 사람들이다.
송진업 : 그러면 이런 얘기를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머물면서 얘기해 주신 게 아닐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아 그럼 당신이 진짜 세상의 구주이군요’ 하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 당신 말 듣고 믿는 게 아니라 이분 말씀을 직접 들으니 메시아고 세상의 구주시다’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끼어 있는 이 이야기가 아주 알맹이고 핵심이다.
홍원석 : 34절이 중요한 것 같은데,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고 되어 있다. 신명기 8:3에 ‘사람이 빵 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는데 그 구절과 연결이 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들을 완수할 때 우리가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임상익 : 저희도 오늘 예수님의 생애 공부했는데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과 비슷한 내용 같다.
정애자 : 오 맞다.
박중현 : 저는 34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고’ 35절 이하에 추수에 관련된 이 부분을 4장 전체를 통틀어서 넓게 생각을 해봤다. 예수님께서 1, 2절에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게 되지 않나. 보통 때 같으면 요단강을 건너서 사마리아 땅을 피해 갈텐데 그러면 시간이 2배 걸린다고 한다. 관습적으로 본다면 예수님도 그렇게 가는 것이 당연하신데 그렇게 안하신다. 바로 지름길로 가신다. 그러면 시간 단축을 위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냐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의 목적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즉 추수를 하기 위해서 그 길로 가신 것이지 빨리 가기 위해 간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4장 3절부터 읽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시간 단축을 위해 간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 나중에 34, 35절 보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 추수이시니까 그래서 그곳으로 갔구나 하고 생각했다.
송진업 : 그렇게 얘기하니까 문맥이 확실해 진다. 왜 추수 얘기를 했는지
홍원석 : 4절에 보면 ‘그때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만 했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목적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임상익 : 배경 주석을 보니까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갔다’고 나와 있던데 그것과 지금 이야기와 좀 안맞는 것 같다.
홍원석 : 학설이 두 개다. 요세푸스라는 역사가에 따르면 사실 유대 사람들도 돌아가지 않고 사마리아를 통해서 많이들 갔다고 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싫긴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우동식 : 아마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굳이 일부러 돌아갔을 것 같다.
홍원석 : 맞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아~ 몰라’ 하면서 그냥 갔을 것이다. (웃음)
우동식 : 사울같은 사람들은 ‘안가~’하면서 돌아갔을 것 같다. (웃음)
박중현 : 어쨌거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홍원석 : 그렇다. 예수님께서 목적을 가지시고 사마리아를 지나신 것이다. 사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시간까지 맞춰 가면서. (웃음)
정애자 : 제자들도 놀랐을 것 같다. 제자들도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나 하면서.
홍원석 : 그러니까 제자들도 못알아 듣는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제자들이 다 똑같이 예수님 말씀을 못알아 듣고 있다.
임상익 : 여기 36절에서 ‘거두는 자’가 우리라고도 할 수 있나?
송진업 : 적용하면 우리라고 할 수 있다.
임상익 :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했는데 우리가 말씀을 받으면, 영생에 이르를 수 있는 아웃풋이 있다. 그러면 ‘삯’이라는 것도 있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 두 개가 있는데 그럼 ‘삯’은 무슨 뜻인가? 아니면 이 삯을 받는 것과 열매를 모으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송진업 : 이 ‘거두는 자’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한다’고 했으니까 ‘거두는 자’는 참여한 자로 본다. ‘이미 삯을 받은 것’과 ‘영생에 이르는 열매’는 같은 주제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시편이나 잠언에서 같은 내용을 달리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홍원석 :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을 미리 받았다?
송진업 : 그게 삯이다.
임상익 : ‘영생에 이르는 열매’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삯이란 게.
홍원석 : 거두는 사람들이 삯을 받았다는 것은 이 사람들은 이미 영생을 받았다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다는 것인가.
송진업 : 그렇게 봤을 때 35절을 보면 ‘눈을 들어 밭을 봐라. 휘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그 대목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현재적 측면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될까.
홍원석 : 그런데 시기상 이때는 전도를 해야 될 때인데, 한국 교회는 지금 다운되고 있다. 추수 다 끝나고 이제...
우동식 : 우리가 백안시하고 있는 그룹이나 대상들에 적용한다면 이런 생각도 해봤다. 기존의 우리 교회 생각하면 좀 아닌 교인들, 교회 안에는 있지만 이상하게 믿거나 기복적으로 믿는 교인들, 진짜 교인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추수할 대상으로 보고 제대로 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그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들어올 사람들이라고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송진업 : 거 좋다. 저는 성경공부해서 깨닫는 것이 좋은데 적용을 해야 우리 심령에 박혀서 애쓰고 힘쓰면서 실천이 된다. 그러면 그것이 언젠가 열매가 된다. 끙끙대면서도 열매를 맺는다. 성경 공부의 목적이 난 거기에 있다고 본다.
큐티도 좋고 다 좋은데 이것이 확실한 하나님의 진리라고 한다면 사마리아 같은 곳도 우리가 전도를 해야 된다. 사마리아가 과연 어디냐, 지금 얘기하신 대로 교회는 다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적용하는 것이 소중한 것 같다.
박중현 : 우리 광야교회 식구들이 그런 역할을 해야 될 것 같다.
송진업 : 그건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해야 한다.
박중현 : 우리 광야교회는 어쨌든 다른 교회에 비해서 복음적으로 잘 깨달은 것이 많고 그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이 있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기존에 복음을 잘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추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정애자 : 저희가 심는 사람일 수도 있고 거두는 사람일 수도 있고, 여기 보면 곡식이 완전히 익어야 거둘 수 있지 않나. 아무 때나 거두면 안된다.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어야 되지, 누군가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그들에게 심고 있고 또 우리가 만일 그분들이 다 준비가 됐다고 하면 거두어야 된다. 또 우리도 중간중간 심어야 되고 그래서 그때 그때 주시는 말씀에 따라서 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해야 될 것 같다. 부담스럽게 ‘난 심어야지!’ ‘난 거두어야지!’ 하지 않고. (웃음)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를 쓰시지 않을까?
우동식 : 아까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았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둔다’고 했던 부분에서 ‘삯 받는 것’과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나눠서 거두는 자가 삯도 받았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사명을 받았다’ 로 해석을 했다. 그리고 추수할 대상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 거의 익어서 들고 오면 되는, 그래서 누군가 어떤 부분만 터치해 주면 하나님 나라 올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모을 사람은 저든 우리 교우들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고 소명감도 주셨다. 그 사람에게 ‘삯을 줬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해야 될 소명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했다.
홍원석 : 그것도 아주 좋은 것 같다.
정애자 :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둔다’는 and를 말하는 게 아닌가? 품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도 거두고.
우동식 : 받은 게 아니라 거둬들이는 것인데 영생에 이르는 열매는 거의 준비가 된 사람들인데 거두어야 된다. 거둘 대상을 영생에 이르는 열매라고 한다. 저는 그렇게 해석을 했다.
정애자 : 품삯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는 것을 동시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우동식 : 사람이 다르다. 거두는 사람이고, 거두어질 대상이고 그렇게 해석을 했다.
정애자 : 아 그렇게 해석이 되나? 그럼 그렇게 해야 될 것 같다. (웃음)
임상익 : 거의 비슷한 얘기인 것 같다. 타이밍을 말씀하셨는데 우동식 교우님은 타이밍이 맞다는 전제가 들어있는 것 같다.
박중현 : 42절까지 정리를 좀 하시고 54절까지 마무리 짓고 다음 토론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54절까지 마무리를 지었으면 좋겠다.
4) 43-54절
홍원석 : 43절 보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다. 그런데 재밌는 게 2장에서 4장까지가 한 덩어리라고 지난 시간에 김진선 자매님이 얘기하셨는데 가만 보니까 진짜 그렇다. 2장에서 갈릴리 가나의 첫 표적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셔서 성전 청결하시고 사마리아로 올라가셨다가 다시 갈릴리 가나에서 두 번째 표적을 행하신다. 한 싸이클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2, 3, 4장이 모두 “변화”라는 주제,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시대가 왔기 때문에 이제 예배도 바뀌고 구원도 바뀌고 하나님 나라 관점도 바뀌고 성전도 바뀌고 그런 변화를 얘기하고 있어서 2-4장까지는 두 개의 표적을 양 끝에 배치해 놓고 그 가운데에서 변화라는 주제를 계속해서 다른 에피소드들로 변주해 가는 한 덩어리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갈릴리 가나의 기적으로 시작해서 갈릴리 가나의 기적으로 끝난다.
임상익 : 맞는 것 같습니다. (웃음)
홍원석 : 또 재밌는 게 갈릴리 가나의 두 표적 사이에 유대 사람을 만나시고,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시고, 이방인을 만나신다. 그 한 덩어리의 이야기 속에서 유다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다 변화된다. 메시아가 오셨기 때문에 모두 다 변화의 패러다임 속에 있다는 주제로 2-4장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 같다.
송진업 :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자, 왕의 관료. 그렇네.
박중현 : 색다른 해석이다.
홍원석 : 2-4장까지 예수님께서 줄기차게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와서 새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모든 게 바뀐다는 것이다. 그 메시지를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계속 반복해서 전달하고 있다.
송진업 : 성경을 꼼꼼히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큰 그림을 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
그런데 44절이 괄호로 되어 있다. 개역 성경에는 괄호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없어도 문맥이 된다. 이 44절이 끼인 이야기 같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오는 이야긴데, 괄호로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중요한 것 같진 않지만.
정애자 :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이 나사렛인가? 갈릴리가 아니고?
홍원석 : 그 부분이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예수님은 유대에서 태어나시지 않았나. 살기는 갈릴리에서 사셨는데, 그래서 이 ‘고향’이 어디를 말하는 건지 좀 헷갈린 부분이 있다. 갈릴리로 가셨으니까 기본적으로는 갈릴리를 말하는 것 같다.
송진업 : 다른 복음서에서는 보통 나사렛에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분위기가 나와 있는 것인데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애자 : 어떻게 보면 나사렛으로 가시면서 그곳에서 될 일을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송진업 : 그래서 저는 어떻게 봤냐 하면 ‘괄호를 왜 쳤지’ 하고 그걸 염두에 두고 읽다 보니까 끝부분에 이것이 두 번째 기적이라고 했다. 고향에서 높임을 못받았는데, 54절에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갈릴리 가나에서 첫표적을 행하지 않으셨나. 그 다음 여기는 가버나움인가?
홍원석 : 아직 가시지 않고 가나에 계시다. 가버나움으로 안가시고 말로 고치셨다. 그래서 가나에서 두 번 표적을 일으키신 것이 된다.
제가 보기엔 44절의 말씀대로 원래 갈릴리에서는 예수님께서 대접을 못받으시다가, 45절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기적일으키신 것을 보고 믿었다’고 한다. 원래는 대접을 못받으셨는데 갈릴리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나서 이제는 믿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신다. 2장에서도 포도주 기적을 보고 믿은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셨다. 똑같은 맥락으로 보여진다.
임상익 : 고향에 대한 것은 관주를 찾아 보면,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 여기서 마 13:57 보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도 똑같은 얘기긴 하다. 그런데 마태복음 13:54에 ‘고향으로 돌아가셨다’에서 고향에 대한 관주를 다시 찾아보면 마태복음 2:23 보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는 ‘나사렛’이라고 나와 있다. 고향이라는 게 나사렛을 말하는 것 같다.
홍원석 : 예수님께서 2장에서도 그렇고 4장에서도 그렇고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이시다.
송진업 : 맞다. 2장에서 ‘너희는 도무지 표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그 얘기를 한다.
정애자 : 보통 사람이 ‘너 고향이 어디냐’ 그러면 딱 한 개만 이야기하나? 그게 궁금하다. (웃음)
홍원석 : (임상익 형제를 보며) 우리 같은 도시 태생들은 고향이 없지 않나? (웃음)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고향이 없는 것 같다.
우동식 : 어려서 이사 간 사람들은, 한 두 살 살다 간 곳 말고 예를 들어 대전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면 거기를 고향이라고 얘기할 것 같다.
송진업 : 고향이라고 하면 부모님이 계신 곳을 얘기하는 게 아닐까?
(잠시 침묵 후 웃음)
정애자 : 유대인의 풍습이 궁금했다. 아까 홍형제가 예수님의 고향을 갈릴리라고 생각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럼 3절이 또 이해가 된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환영했는데 그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갔다가 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것도 이해가 되기는 하는데 궁금했다. (웃음)
송진업 : 나사렛과 가나가 가깝다. 제가 나사렛 들렀다가 가나를 갔는데 가나를 가니까 그 산동네가 내려다 보였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가 가깝다. 호수 근방이.
어쨌든 그건 논외고, 왕의 관리의 아들이 심히 죽을 병이 걸렸는데 말 한마디로 고치셨는데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행하신 게 커서 그런지 이게 어떤 기적인가. 죽지는 않았지 않나.
임상익 : 유대인들은 표적을 봐야만 믿는 그런 게 있고 여기 윗 부분에 사마리아인들은 말씀만으로도 믿었지 않나. 그것을 대비시키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홍원석 : 더구나 이 왕실 관리는 완전히 말씀만으로 믿는다. 그래서 이게 거의 결론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이 사람은 고쳐주시지도 않았는데 ‘나았으니까 가라’ 하시니까 바로 믿고 간다. 가장 모범적인 케이스, 인격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하필 또 그게 이방인이다.
송진업 : 그 사람이 이방인인가?
홍원석 : 배경 주석에는 왕실 관리가 이방인이라고 되어 있었다.
송진업 : 이 때 왕이 헤롯 안디바가 맞나?
임상익 : 그 사람이라고 배경주석에 나왔다.
우동식 : 이두메 사람이다.
송진업 : 원래 헤롯이 이두메 사람이다.
우동식 : 이방인이다. 그럼 48절에 핀잔 주신 것은 이방인에게 핀잔을 주신 게 아니고 그 주변에 있는 유대인들 보고 핀잔을 주신 것인가?
홍원석 : 분명히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즉 그 왕실관리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나오는데 저도 좀 헷갈렸다.
송진업 : 그래서 47-49절을 보면 48절까지 현재 신하의 믿음이 글로 보면 점점 발전하는 것 같다. 그리고 50절에 보니까 ‘믿고 갔다’고 했다 그것은 굉장히 좋아진 믿음 같고 그전에는 ‘내 아들 병 좀 고쳐 주세요. 죽게 됐어요’ 하니까 예수님께서 48절에 ‘아니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하시는 거 보면 믿음이 없다는 핀잔을 주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다.
임상익 : 여기서 너희는 유대인인 것 같기는 하다.
송진업 : 유대인인가? 아니면 왕의 신하까지 포함하는 것인가?
홍원석 : 제가 볼 때는 지금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시기 때문에 유대인을 말하는 것 같진 않다. 당대의 사람들 모두 사실은 표적을 봐야 믿지 누가 말만한다고 믿지는 않지 않나. 그래서 아마 이 사람도 대표 선수로, (웃음) 당대 사람들 전체의 대표 선수로 ‘너희는 도대체가 표징이나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구나’ 이런 말씀을 들은 것 같은데.
임상익 : 그런데 관주를 보면 ‘너희는’에 연결된 관주를 보면 요2:18절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다.
홍원석 : 그런데 이 대목은 유대가 아니라 갈릴리에 와서 하신 말씀이라서 유대인으로 보긴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지역이 유대인들 사는 데가 아니라서. 갈릴리는 거의 이방땅으로 여겨진 곳이다.
우동식 : 2:18은 유대인을 얘기한 게 아니라 표적을 얘기한 것이다. 18절에.
송진업 : 관주는 표적인 것 같다. 표적에 관한 관주인 것 같다.
홍원석 : 어쨌든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사람들이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들의 대표 선수들인데 이 사람들이 다 처음에는 못깨닫고 꾸중 듣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다 믿게 되는 결말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 왕실 관리도 표징을 먼저 듣고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게 아닐까? 표징과 이적을 듣기라도 하지 않았으면 병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찾아오지 않았을 것 같다.
송진업 : 상익 형제 20장에 나오는 표적은 유대인이 아니라 표적에 대한 관주다.
박중현 : 표적 안보고 믿는 사람들 있었지 않나. 사마리아 고을 사람들.
홍원석 : 사마리아 사람들도 모여들 때는 사실 사마리아 여자가 ‘내 일을 모두 맞춘 사람이 있다’ 고 했더니 그 말을 듣고 모여든 것이라서 표적이 아예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임상익 : 그런데 제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 관주 볼 때 ‘너희는’ 이라고 된 부분에 ㄱ이 있어서 찾아 봤는데 그럼 이것은 ‘너희는’에 대한 관주인건가?
송진업 :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까지 관주로 연결되는 것이다.
임상익 : 아 그게 거기까지 포함되는 건가. 단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뒤의 문장까지 보는 것인가. 알겠다.
송진업 : 관주가 6:30 도 그렇고 20:20도 그렇고 표적에 관한 것이다.
박중현 : 여기서 ‘너희는’은 홍형제가 말한 것처럼 갈릴리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고 전체적으로 볼 때는 갈릴리 사람이든지 유대 사람이든지 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홍원석 :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게 두 번째 표적이라고 하지 않나. 사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표징들을 많이 일으키신 것이 본문에 나온다. 갈릴리의 첫 번째 표징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인데 그게 패러다임의 변화, ‘메시아적 종말의 새시대가 왔으니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2장에서 살펴봤고 두 번째 표징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방인들이 이제 메시아가 오셔서 살려주신다’ 이것도 패러다임의 변화로 볼 수 있겠다. 그래서 2-4장은 계속 ‘메시아의 새시대’, ‘메시아의 오심으로 인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반복해서 계속 얘기하고 있다.
임상익 : 그런 것 같다.
정애자 : 그리고 이 관리는 또 죽기 전에 좀 와달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라 살았다’고 말씀하신다.
송진업 : ‘믿음이 조금씩 발전하는 것 같다’는 내 얘기는 아웃된 건가?
홍원석 : 아니 그게 맞는 것 같다. (웃음)
송진업 : 왕실 관리가 ‘나았으니 가라’ 는 말씀을 듣고 가긴 가는데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다가 종들이 마주 와서 ‘살았다’고 하니까 시간을 확인한다. 그때 믿음이 완전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임상익 :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애자 : 믿음이 그렇게 발전하는 거다. 순서가 있다.
송진업 : 그래서 왕실 관리의 온 집안이 다 믿었다는 것은 믿음이 완전해 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우동식 : 42절에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세상의 구주임을 앎이라.’ 라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고백을 하지 않나. 이분들은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부활 전에 구주로 인정을 한 것이다.
홍원석 : 그것도 놀라운 부분인데, ‘이스라엘의 메시아’라고 안하고 ‘세상의 구주’라고 한다. 이 사람들도 메시아 사상에 대해 알고 있었을 텐데 ‘이스라엘 메시아’가 아닌 ‘세상의 구주’라고 하니까 훨씬 더 크게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송진업 : 벌써 휘어져서 추수가 일어나기 직전의 상태이다가 손 한번 때니까 싹 추수가 된 것이다.
우동식 : 이 사람들도 성경 공부 열심히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여자가 와서 ‘그리스도가 온 것 같다’ 한번 와보라 하니까 ‘뭐라고~~?’ (웃음) 하면서 온 것이다. 그러니까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박중현 : 그래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늘 말씀을 연구하고 있으니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송진업 : 오늘도 이렇게 같이 나누니까 배움이 증폭된다.
임상익 : 너무 좋은 것 같다. 잠깐 참여했지만. 너무 좋은 것 같다.
(끝)
다음날 추가 토론 in 카톡
송진업 : 어제 요4장 GBS 중 다시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 올립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새번역 요 4:24)
‘영과 진리’에서~~ 영은 성령, 진리는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 얘기를 나누었었죠?
그런데 저는 자꾸 예배드리는 사람의 ‘영’과 그 사람의 ‘진리’로 읽혀집니다.
누가 도움을 주세요. ㅠㅠ
임상익 : 영은 앞에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라면서 연결이 되니 뒤의 영도 성령이라고 봐야 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글고 진리도 우리 입장(예배드리는 사람)에서 진리라고 생각되지만, 이 진리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여야 올바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봐야한다고 생각하시면 좀 도움이 되시려나 모르겠네요 ^^
송진업 : 언제나 상익형제 고마워요. 하브루타!
그렇다면은 이런 질문이 생기네요.
성령과 예수그리스도로 예배드린다면 (본문의 문맥상에서는 암시하는 바 없지만) 누가 그 예배를 받으시나요? 성부 하나님이 성령과 아들 그리스도로 예배 받으신다는 말인가요?
3위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 모두 예배 받으실 대상 아닌가요?
23절과 24절의 문장을 아무리 살펴도 영은 성령,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하기가 쉽지 않아 보여요. ㅜㅜ
홍원석 : ‘그리심 산에서’, ‘예루살렘에서’, ‘영과 진리로’ 할 때 쓰인 전치사가 ‘엔’인데 ‘~안에서’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영어로는 ‘in’입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 하면 ‘그리심 산 안에서’, ‘예루살렘 안에서’, ‘영과 진리 안에서’ 이렇게 번역하는 게 더 원문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리심산, 예루살렘 안에서’ 예배드리던 것을 이제는 ‘성령과 예수님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봤습니다.
그리심산 ‘안’에서, 예루살렘 ‘안’에서 -> 영과 진리 ‘안’에서
신령과 진정이라는 개역의 표현이 언뜻 예배드리는 사람의 개인적인 마음 자세(?)를 뜻하는 것처럼 읽히는데, ‘영과 진리 안에서’는 예배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객관적인 시대적 특징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면 저는 좋을 것 같네요. 그리심 산 안에서나 예루살렘 안에서 드리던 예배는 이제 끝나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새시대의 도래, 그때가 왔다는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받으시는 주체는 4장의 문맥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 한정되는 것으로 읽히네요. 우리들이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성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으로 의미를 한정시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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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비밀스럽지 않은 비밀이야기, 하나님 나라의 비밀
![]() | 강동영 | 2016.02.17 | 782 |
7 | 2015 구미, 남부, 서부 교회 연합 겨울수련회 스케치 | 강동영 | 2016.01.09 | 992 |
6 | 2013년 봄수련회 - 동영상 | 강동영 | 2015.11.17 | 530 |
5 |
한 장의 작품 사진 - 2013
![]() | 강동영 | 2015.10.27 | 544 |
4 |
광야교회 추억의 사진 - 2011년
![]() | 강동영 | 2015.10.25 | 862 |
3 | 서부교회 성탄절 찬양 | 서정학 | 2014.12.21 | 981 |
2 | 12월 7일자 뉴스앤조이 기사 | 윤병수 | 2014.12.10 | 1462 |
1 | 광야교회 홈페이지 너무 좋습니다. [1] | 박희정 | 2014.10.06 | 1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