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3일 서부광야교회 주일 성경공부 동아리 4회 모임
1) 1절 - 21절
장재훈 : 오늘 3장 할 차례이다.
김진선 : 민장로님 카톡방 초대되었나?
홍원석, 장재훈 : 아니다. 안하시는 것 같다.
장재훈 : 민장로님 카톡 보시나? 거기서 계속 토론을 하고 있다.
민경동 : 그냥 나는 토론하는 거 듣겠다. (웃음)
홍원석 : 토론한 거 광야교회 홈페이지에 올려놨다.
민경동 : 잘 못 본다. (웃음)
장재훈 : 지난주와 지지난주 모임 했던 거는 타이핑해서 홈페이지에 올려놨다.
민경동 : 홈페이지는 내가 들어간다. 한번 보겠다. 홈페이지 까페인가?
홍원석 : 그렇다.
장재훈 : 김진선 자매님 기도로 시작하겠다. 오늘은 3장이다. 우선 단락을 나누신 분들 이야기 해주시라.
송진업 : 단락을 1절부터 21절, 22절부터 36절로 크게 나눴다. 소문단으로 1절부터 11절 상, 대화가 1인칭으로 되다가 3인칭으로 넘어가더라. 자를지 마를지 고민했다. 2문단은 22-30 요한의 그리스도 소개1, 32-36 그리스도 소개2 이렇게 나눠봤다.
장재훈 : 다르게 나누신 분 계신가? 저는 세 문단으로 나눴다. 비슷한데, 30절과 31절 사이를 나눴다. 30절까지 나누고 31절부터 36절까지로 나누었다. 그러면 첫째 문단을 1절부터 21절로 볼 때 나눌 수 있는 부분이 있으시면 이야기해 달라.
김진선 : 1절 니고데모 소개, 2-11절까지 나누고 12-15절까지 나누고 16에서 21절까지, 22절에서 30절, 31절에서 마지막 절까지로 나누었다.
장재훈 : 앞부분을 많이 나누셨다.
김충일 : 애매하더라. 저도 11절까지로 할지 12절까지로 할지 뭔가 내용이 전환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김진선 : 13절에서 15절까지 하나님의 일을 설명하는 것 같고 그 이후에는 16-21절까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부연 설명을 하는 것 같다.
장재훈 : 문단 나누기에 관해 더 이야기하실 분이 계신가?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겠다. 1-21절까지 먼저 본문을 보면서 질문할 것 질문하고 토의하면서 나가고, 또 본문에 대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도 점검해보았으면 좋겠다.
가장 첫 번째 했던 질문은 왜 밤에 니고데모가 찾아왔느냐 하는 질문을 했었다. 누가 답변을 다셨던데 누가 다셨나?
임상익 : 밤에 찾아온 이유는 니고데모가 예수님께서 메시아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걸 인정은 하는데, 주변 동료 바리새인들의 시선이나 세상의 권세가 두려웠기 때문에 대놓고 찾아오지는 못하고 밤에 찾아온 것으로 이해했다.
우동식 : 이 시점에 메시아로 인정을 했는지는 좀 의문이다. 여러 가지 표적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까지는 알았으나 메시아로까지 인식한 것 같지는 않다.
임상익 : 질문 중에 박중현 교우께서 어떤 심정으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2절에 나오는 말을 고백하기 위해서일까? 이 질문인데, 심정도 심정이지만 갑자기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다른 의미의 질문이었는데 나도 그것이 궁금했다.
김충일 : 저는 밤에 찾아간 것까지 질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런 부분까지 봐야 되겠구나 하는 걸 생각했다. 밤에 찾아간 게 다급해서 찾아갔을 수 있고 아니면 다른 바리새인들한테 걸릴까봐 그랬을 수 있다. 메시아라는 고백은 하지 않지만 뭔가 예수님을 대단하신 분으로 느껴 좀 얘길 해보려고 간 게 아닐까 하고 저도 후자 쪽으로 생각을 해봤다.
송진업 : 관주를 보니까, ‘밤에’ 라는 앞에 요한복음 12:42절이 있다. 이것을 보면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한다’ 했고, 그 이유는‘ 이는 추례를 당할까 두려워서다’라고 했다. 드러내놓고 갈 수가 없는 것이다.
홍원석 : 현실적인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한이 상징적인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그래서 ‘밤에’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 가를 보니까 9:4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텐데 그때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11:10에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밤이라는 단어를 시간적인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무지’와 연결을 시켜서 밤에 예수님께 왔다는 자체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저자인 요한이 니고데모라는 사람에 대해 사실은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의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현실적인 의미도 있고 상징적으로 영적인 무지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니고데모가 말할 때도 ‘저는’ 이라고 안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 요한이 니고데모를 등장시켰을 때는 단순히 니고데모 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니고데모란 사람으로 대표시켜서 등장시킨 것 같다. 그래서 ‘밤’이라는 단어라든지,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니고데모와만 대화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못 받아들이는 어둠 속에 있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화하시는 것으로 보는 게 요한의 의도가 아닐까 한다.
임상익 : 그러면 그것이 19절에 ‘빛’하고 ‘어둠’이 나오는데 그 ‘어둠’하고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홍원석 : 맞다. 연관이 있을 것 같다.
김진선 : 덧붙여서, 전에 배운 바에 의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꼭 시간적 배경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원석 형제가 얘기한 것처럼 이중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니고데모의 ‘밤’이라는 굳이 쓰지 않아도 될 표현을 쓴 것은 시선을 회피하려는 의도도 있기는 했지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둠 속에서 알아보지 못한 니고데모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김충일 : 니고데모가 바리새파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는 구별된 사람이 아닌가?
김진선 : 지금은 이 사람이 어두운 상태에 있다가 7장, 15장에서 보듯이 점점 예수님을 알아가는 어떤 그런 쪽으로 볼 수 있다.
장재훈 : 이 사람이 바리새인들을 대표한다는 게 아니라 요한이 이 글을 적을 때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들을 대표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그런 의미이다.
홍원석 : 니고데모가 한 말 속에 니고데모의 영적인 수준이 나와 있다.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온 선생’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게 사실은 니고데모의 수준인 것이다. 메시아로 보지 못하고 그냥 선생님, 선지자 정도로 본 것이다.
김충일 : 예수님이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셨나? (웃음)
김진선 : 궁금해서 오긴 왔는데 질문하는 게 이상하다. ‘당신 진짜 메시아냐, 진짜 하나님에게서 왔느냐’ 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신 줄 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없다.’ 이런 얘기가 좀 거만스럽게 느껴진다. 유대인으로서 궁금해서 오긴 왔는데 약간의 교만함이 들어있는 것 같다.
송진업 : 그런 것도 있지만 이분이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3절에 가면 예수님께서 좀 그것과는 다른 대답을 하는 느낌이 든다.
장재훈: 그럼 3절까지 연결해서 본다면, 2절과 3절의 대화가 어색한 것처럼 말씀들을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실은 질문한 것이 아니라 고백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님께서 질문을 받으신 것처럼 답변을 하신다.
김진선 : 아시니까, 그 사람 니고데모를 아시니까 역으로 마음속에 있는 질문을 간파하신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지 않나. 유대인의 선생이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을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런데 와서 정작 메시아냐고 물어보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역으로 ‘네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바로 거듭나지 않으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송진업 : 2절 니고데모의 질문은 표적을 얘기하는 거고,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의 시각은 표적이고 예수님은 그걸 교정해 주시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고 있다.
최종택 : 그런데 니고데모가 표적 때문에 이렇게 밤에 와서 예수님께 물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니고데모 입장에서 보면 분명 특별한 분 같기는 한데, 이분의 정체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오긴 왔지만 정말 대놓고 ‘당신이 메시아요’ 이야기하긴 부담스러운 상태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예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홍원석 : 저는 이렇게 봤다. 니고데모가 말하기를 ‘우리는 스승님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다’ 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는 사실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당신이 스승인 것을 알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해 그건 올바로 본 것이 아니라는 진단을 해주시면서 ‘네 상태가 지금 영적이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못보고 있는 상태다’라는 것을 지적해 주시는 것 같다. 그래서 2, 3절이 그렇게 어색한 것 같지 않다.
임상익 : 저도 동감한다. 나중에 ‘우리’, ‘너희’를 구분하는 것을 봐서도 그렇게 연관되는 것 같다.
장재훈 :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씀을 드린다. 우리가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고 하니까 어떨 때는 반대 의견을 강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하니까 계급장을 떼놓고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웃음)
임상익 : 아 좋다. 좋다. (폭소)
장재훈 : 상익 형제를 위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웃음)
임상익 : 자세부터 좀 풀어도 되겠나? (폭소) 죄송하다.
송진업 : 웃통 벗을까? (폭소)
장재훈 : 죄송할 필요 없이 편안하게 이야기하면 된다. 그리고 하다보면 토론이라는 것이 반대 의견을 들으면 누구나 기분이 나쁘다. 나쁠 수 있지만 여기서만 기분 나쁘고 나갈 때는 토론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우리가 반대의견도 강하게 이야기하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좋아지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오셨으면 좋을 것 같다. (웃음)
진도를 나가면서 민장로님께서 정리를 해주시니까 진행을 하도록 하겠다.
4-6절 말씀을 보면서 질문하실 것 있으면 질문하시라.
임상익 : 저는 5절에 질문이 있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관주를 찾아 봤더니 물에 관련 되서는 에스겔서 36:25-27이었다. 거기 보면 ‘맑은 물로 정결케 하고 성령으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에 고후 1:21에 ‘나중에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럼 물이 정결케 하는 수단인 것이고 실제적으로 받아야 될 것은 성령인 것인가. 제가 맞게 생각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김충일 : 저도 똑같이 생각했다. 8절에 보면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야지 왜 여기서는 성령만 얘기할까. 왜 앞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해서 물이 포함되는데 뒷 부분은 성령만 얘기하고 물이 포함이 안되었을까 하고 궁금했다.
홍원석 : 저도 엄청 궁금했다. 성령은 알겠는데 대체 그럼 물은 뭔가. 보통 여기서 목사들이 세례라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럼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데 그 물을 세례라고 하면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 정말 그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4장에 가서 보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을 물에 비유하신다. 성령을 ‘샘솟는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비유하신다. 그럼 이 물은 결국 성령을 얘기하시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했는데, 6절에서는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라 해서 ‘물과 성령’을 ‘영’이라는 한 단어로 줄여놓았다.
제가 볼 때는 결국 물과 성령은 같은 뜻이 아닌가 싶다. 다만 기능적인 부분으로 다르게 설명하기 위해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80% 정도 생각하는데 20% 정도는 확신을 못하겠다.
최종택 : 저도 공감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게 사실 물이 일종의 세례라고 볼 수 있는데 세례라고 보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는 것을 세례로 상징해서 표현한 것이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다는 게 결국은 정결케 되어서 새롭게 태어나는 중생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다.
장재훈 ; 그냥 세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최종택 : 그렇다.
김진선 : ‘물과 성령’에서 ‘과’가 동격 접속사라고 얘기하니까 그게 맞는 것 같다.
장재훈 : 물 즉 성령으로 보는 것인가? 다른 번역에는 뭐라고 되어 있나?
홍원석 : 타번역도 모두 ‘물과 성령’으로 되어 있다.
김진선 : 우리가 세례 요한 때문에 물로 세례 주는 것으로 구별하는데,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와 세례 요한의 세례만 구분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물과 성령을 두 개로 보지 않고 같은 것으로 보는 게 맞다고 한다.
장재훈 : 우동식 교우는 6절을 어떻게 보셨나
우동식 : 6절? 앉아서 봤다. (웃음)
예전에 이 부분을 여러 번 볼 때도 이 구절이 왜 들어갔을까, 그냥 의미도 없는 것 같고 연결도 잘 안되는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앞뒤를 좀 꼼꼼히 보다 보니까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것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예수님께 물으니 예수님께서 답을 하시는데 ‘거듭남이 다시 어머니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내가 말하는 것은 영으로 나는 것이다. 네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는 측면에서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고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헤매고 있는 것에 대해 답을 이것으로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이 부분이 그렇게 의문이 해소가 되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
임상익 : 공감이 간다.
홍원석 : 4절에서 니고데모가 ‘어떻게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태어나냐’ 라고 물으니까 ‘야 그것은 육이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고 하신 것 같다.
민경동 : 조금 거기서, 우리가 서로 잘 찾아보고 문의를 했는데 동격으로 보는 것은 일부 학자들의 얘기지만 그렇게 보는 건 좀 무리가 있는 게 물이란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썼고 성령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썼는데, 아까 관주에서 에스겔 36장의 씻는다는 의미가 물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본문에도 에베소 5:26에도 ‘물로 씻어’ 그렇게 되어 있다. 물론 성령의 역할이 씻어주는 역할에 결국 들어가지만 씻는다는 의미를 물로 표현했고 아까 4장으로 넘어가서 물을 성령이라고 하는데 이 생수는 성령의 강이 흘러가지만 생수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생수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한 것이니까 그런 의미로 바로 그쪽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씻는다는 의미로 보는 게 좋겠다.
에베소서 5:26을 보자. 거기 보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니까 이 물은 이쪽에서 얘기할 때는 어떤 물이 되냐 하면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즉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디도서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3:5이다. 이 물이라는 의미를 ‘우리가 죄를 씻는다, 깨끗하게 한다’는 정결의 의미가 물론 성령의 세례를 통해 일어나지만 이 구원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거듭남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더러운 것에서 깨끗해지는 두 가지 측면을 다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물과 성령을 따로 썼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전체적인 이해를 하려면 그렇게 봐야 한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 그것이 새언약부터 계속 깨끗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깨끗하게 어떻게 하느냐, 성령을 넣어줘서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율례를 지키게 하여 흠이 없게 하는 쪽으로 만드는 것이니까 물을 좀 드러내 주는 구원의 과정 속에서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구원의 과정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게 뭐냐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이 깨끗해지고 흠이 없고 거룩해 지는 구원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들어온 거니까 그 부분을 같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의사진행 발언을 하겠다. 공부를 할 때 PBS를 하다 보니까 자세히 관찰하고 많이 논의를 하는데 관찰해 온 걸 가지고 ‘나는 이렇게 봤다’ 라는 것을 얘기하고 의문이 있으면 논의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제를 찾는 것이다. 지금 꽤 긴 시간 동안 ‘밤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논의를 했는데 그걸 누가 찾았으면 그냥 얘기를 탁 던져주고,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아닌 것 같다고 의사 표시를 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이 3장에서 얘기하는 주제가 많다. 요한복음 1장 얘기할 때 1-18절까지 주제가 다 나왔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어떤 주제를 찾아서 3장의 핵심적 주제와 연결시켜 논의를 해야 한다. 지엽적인 부분들을 설명하는 것은 누가 찾았으면 사전적인 의미에서 얘기해 주고 그게 아니다 하면 짧게 토의하고 그냥 넘어가자. 그래서 우리가 찾아보지 않은 것을 누군가가 찾아왔으면 그것을 알려주고,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찾을 것은 주제이다. 주제가 한 2-3가지가 나온다. 이 주제를 자꾸 찾아서 ‘3장이 얘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다’ 하는 핵심적인 큰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다 준비를 해왔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진행이 너무 미세한 쪽으로 가니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장재훈 : 말씀하신 것처럼 21절까지 요한이 말하려고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계속 토론도 했고 이야기도 하면서 과연 요한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가지일수도 있고 여러 가지일 수도 있는데 생각나시는 대로 말씀 좀 해주시라.
홍원석 : 2장과의 관계 속에서 봐야 될 것 같다. 2장에서는 혼인 잔치에서 정결통 6개에 담겨있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심으로써 메시아적인 종말의 새 시대가 온 것을 액션으로,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선지자적 상징 행동으로써 보여 주셨다.
그것이 3장으로 넘어오면서 앞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신 ‘메시아적 종말의 새 시대’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말로 설명해 주시는 흐름인 것 같다. 2장 , 3장이 잘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2장에서는 ‘메시아의 새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내가 왔으니 모든 것이 변한다’ 라고 메시지를 주시고 3장에서는 그럼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대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성령으로 태어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 시대가 되었다’ 이런 주제로 저는 정리해 보았다.
임상익 :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3장에서 일단은 제일 먼저 니고데모라는 한 사람을 들어서 진짜 거듭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다음 내용은,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은 어떻게 역사하느냐에 대해서 ‘바람과 같다’라고 표현을 하면서 성령으로 난 사람을 묘사한 것 같고, 그 다음에는 ‘내가 이렇게 많은 표적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믿지 못하느냐’에서 ‘나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마무리로 세 부분으로 얘기하는 것 같다.
김충일 : 저는 보통 묵상을 할 때 성경공부같이 하고 성경공부를 할 때 묵상을 하듯이 한다. (웃음) 저는 문단 나누면서 제목을 딱 보는데 예수와 니고데모라고 되어 있었다. 1-21절까지. 이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11절로 나눌까 12절로 나눌까 13절로 나눌까 고민을 했는데 뚜렷하게 나눠지지는 않지만 뭔가 파트1, 파트2, 파트3이 있는 것 같다.
파트1이 성령으로 난 사람, 성령으로 태어나야 된다는 의미였고, 파트2가 인자가 내려온 이유, 하나님께서 인자를 보내신 이유. 이렇게 해서 이게 한 단락이 된다. 그럼 이 두 개를 합쳐서 뭐라고 해야 될까 하다가, 그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되는 것이고, 인자를 보내신 이유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보다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자를 보내시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갑자기 별로 신경도 안 썼던 16절이 딱 보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고 하니까 아 이게 그러면 묵상처럼 했을 때는 1-21절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서 그게 세상을 구하신 거고 그렇게 세상을 구하고 이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성령으로 다시 나야된다’고 하고 그렇게 하다가 저도 좀 성경공부가 묵상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주제를 저는 그렇게 봤다.
김진선 : 저도 비슷하다. 앞부분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12, 13절에 구약의 예를 들면서 모세가 구약을 대표하는 것 같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뱀을 들어서 인자도 같이 들려야 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그런 주제로 봤다.
장재훈 : 앞부분은 ‘하나님 나라 들어가려면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을 얘기하는 것 같고, 두 번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이 광야에서 들렸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된다’는 부분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뒷부분에 와서 21절까지는 또다시 평화를 이야기하시는 것 같고 ‘빛에 속한 사람들 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는 것인가’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저는 그러면서 질문이 생겼던 부분은 앞에서 질문하신 부분하고 비슷한데 8절의 부분들이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질문했지만 13절의 부분들 왜 과거형으로 되어 있을까, ‘하늘에 올라갔다’는 게 뭘까 그걸 알아야 본문의 의미가 좀 분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8절의 비유는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임상익 : 전도서 11:5를 보면 ‘바람과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취는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모른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이 약간 바람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예측할 수 없게 역사하시는 그런 부분인 것 같다.
장재훈 : 13절에서는 ‘오직 예수님 밖에 하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이가 없다’는 의미인가?
임상익 : 분명하진 않지만 저도 비슷하게 본 것 같다. 그것을 관주를 찾아보니까 사도행전 2:34에 ‘다윗은 하늘로 올라간 적이 없다’는 표현도 있고, 잠언 30:4도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온 자가 누구냐’ 라는 표현도 있어서, 하늘의 일을 인자 외에는 모른다는 의미로 보이고 저는 좀 더 크게 해석을 했는데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인자 밖에 없다’ 이렇게 해석을 하였다.
송진업 : 그런데 13절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하나만 떨어뜨려서 생각하면 굉장히 어려울 것 같고 앞의 12절, 11절과 연결시켜서 생각을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올라간 자’라고 하는 것이 뭘 얘기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가? 12절에도 보면 ‘땅의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면 너희가 믿겠느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사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서두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다’ 라고 시작을 하기 때문에 이미 이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13절의 ‘하늘에서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는 것들’이 인자라는 표현이, 인자가 예수님이지 않나, 하늘에서 내려온 자, 그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14절은 이를 설명한 것이다.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얘기다. 뱀에 물린 자들을 놋뱀 만들어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았지 않나.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들도 살 생명을 얻을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진선 : 13절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 하늘로 올라간 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1장 51절에 인자가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건은 창세기의 야곱 벧엘 사건과 연결을 시켜서 봐야 한다. 전에 배울 때 이것이 완료형 동사라고 한다. 그러니까 과거에 어떤 사건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하면 이것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약에서 죽지 않고 신약에서 죽었지만 그 영향으로 구약의 사람들도 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것처럼 그런 뜻으로 생각이 되었다. 1:51의 ‘오르락내리락 한다’라는 것이 이 구절을 보면서 생각이 났다.
장재훈 : 17-21절까지 본문은 무얼 말하려고 하는 건가?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고 미리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미리 심판을 받았다는 게 뭐냐 하면서 19절부터 설명을 한다.
김충일 : 1장의 빛과 어둠, 생명과 사망, 새창조 그 부분과 연결되는 것 같다.
김진선 : 알 수는 없지만, 바람은 임의로 분다. 바람은 느끼는 것처럼 기원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내적으로 변화가 온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바람은 있는데 느끼는 것처럼..
송진업 : 다른 말로 하면, 전파가 있기 때문에 통신을 한다. 그런데 전파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김진선 : 바람을 느끼는 것처럼 알 수 있다는 말인 것 같다.
민경동 : 그것도 뭐 큰 주제는 아닌데, 헬라어의 프튜마라는 단어가 바람과 성령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언어유희로 표현하고 있다. 이게 의미가 있게 비유를 한 것이다. 실제 성령님께서 들어와 계신 것과 바람하고 유사하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께서 언제 들어오셔서 계시는지 모르지만 사람 안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주 지혜롭게 언어유희로 표현하고 계신 것이다. 그냥 변화가 일어나고 거듭나는 것에 대한 표현을 참 맛이 나게 표현을 하셨다 하는 정도로 넘어가면 될 것 같다.
임상익 : 저는 17절-21절로 돌아가면 빛의 영역에 우리가 있어야 되고 거기 나아가서 행위도 거기 맞게 해야 된다는 것까지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21절에 보면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행위까지도 원하는 그런 주제인 것 같다.
송진업 : 아까 충일 형제 얘기했던 대로 1:10-11, 12에 보면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 같다. ‘그가 세상에 계셨는데 자기 땅에 왔는데 백성이 영접치 않았다. 그런데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그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 얘기가 지금 3:17-21까지의 주제와 비슷한 것 같이 느껴졌다. 하나님께서 17절 이후부터는 심판하러 오시진 않고 구원하러 오셨지만 이미 심판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미 있다는 얘기다.
장재훈 : 또 하나 궁금했던 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빛이 왔는데도 어둠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심판의 의미를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심판받는다고 하면 뭔가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든지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체가 심판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것이 과연 심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김충일 :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심판을 이미 받았다’고 했는데 아무런 해가 오지도 않는데 뭐가 이미 받은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건가? 앞에 1장에서 보면 사망이나 어둠에 있는 게 심판을 받았다는 건데 그게 딱 와 닿지 않아서 제 마음대로 해석하다 보니까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것 자체가 심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판의 의미가 상식적인 것과 좀 다른 걸로도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임상익 : 저는 결과론적인 것도 맞는 것 같다. 하나님과 단절되서 살면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이지 않나. 세상 논리에 맞춰서 사는 건데 제 경험상, 제가 세상 속에서 살 때는 늘 번민도 있었고 정확한 판단 기준도 없었고 굉장히 괴로움 속에서 많이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묵상도 하면서 받아들이니까 그런 것이 많이 사라지면서 평안도 많이 오고 기쁨도 더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하나님 없이 홀로 살아가는 이게 심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그 자체가 벌인 것이다. 결과물로도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충일 : 우리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이게 그런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 것 같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홍원석 : 다른 측면도 있는 것 같은데, 형 집행 받기 이전에 선고가 내려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형 집행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고 이미 유죄 선고가 내려진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장재훈 : 실제로는 나중에 형벌을 받게 된다는 뜻인가?
임상익 : 우리가 육적으로 죽었을 때 말씀하시는 것인가? 형벌을 받는다는 시점은?
송진업 :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큰일 났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러면 이걸 읽는 독자들은 구원받는 쪽으로 가려고 생각할 것이다.
장재훈 : 그런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글이다?
민경동 : 그런 질문이 나올 때는 이미 지득되어 있는 성경의 말씀들이 있는데 구원에 관한 말씀과 심판에 관한 말씀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연상해서 ‘이게 뭘까’ 하고 상상을 하지 말고 관주도 찾아보는 게 좋겠다. 유추를 해보면서 말씀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아 그거구나’ 하는 답을 찾을 수 있고 그게 좋은 공부다. 그냥 상상하지 않도록 하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걸 듣고서 맞다고 하는 것도 무리다.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종은데 쉽지는 않다.
예를 들면 성경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려우니까 그런 방법론을 배워가는 것인데, 제가 성경을 본 것에 의해 찾아가 보면, 지금 정죄는 무엇이냐 그래서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빛이 있는데 이게 어둠 속에 있는 것을 죄라고 하고 그 안에 진리가 없다고 얘기한다. 진리 얘기하고, 죄 얘기하고, 어둠 얘기하고, 주제가 막 같이 섞여 나온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 아래 있다가 죄의 정죄에서 풀려난 것이다. 그래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렇다면 죄가 뭐냐. 죄 아래 있다는 게 뭐냐.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 얘기한다. 로마서 1장으로 한번 가보자. 내가 정답을 얘기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방법론을 얘기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혼자 공부할 때 계속 찾아가서 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인데 1장을 한번 보시라. 죄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두 가지다. 24절에 보면 우상숭배의 결과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으니’ 우상숭배의 결과로 버렸다고 한다. 26절에도 보면 대표적으로 동성애를 이야기하는데 창조 질서를 어기는 것이 문제지 동성애 자체가, 동성애만이 큰 문제라고 기독교에서 들고 나오는데 그런 의미보다는 대표로 ‘이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하고’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한다. 또 28절에 도덕적인 문제 타락을 이야기하는데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어둠을 좋아하고 빛을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이렇게 했다.
그럼 이 세 가지가 죄의 전형적인 3개 유형이다. 우상숭배,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도덕적 타락. 말하자면 이것이 결과다. 이 결과가 어떻게 나왔냐 하면 ‘내버려뒀다’는 것이다. 그럼 첫 창조된 우리를 이 상태로 내버려두면 이게 심판이고 죽음이다. 그것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하지 않나. 죽었으면 심판이지 뭐 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니까 빛으로 나오지 않고 다시 거듭나지 않고 다시 새롭게 창조되지 않는 모든 자연인은 다 지금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거기서 건져내는 것이다. 구원의 개념이 건져내는 것으로 보면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심판이지 이걸 다시 진멸을 해야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지옥이라는 용어 자체가 상징적인 용어이다. 천국이 장소적인 용어가 아니듯이 1차적으로 지금 게헨나라고 하는 지옥이라는 표현도 일단은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상태, 1차적으로 에덴 동산을 뛰쳐나온 상태 자체가 심판이다. 영적으로 죽은 것 자체가 심판이지 그걸 또 죽이나? 어떻게 또 죽이나?
그러나 육신의 몸이 있기 때문에 이것까지 완벽하게 끝날 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옥이라고 하는데 ‘지옥이 어떠냐’ 하는 것은 ‘꼭 장소냐’ 하는 문제까지도 나오는데 그 문제는 좀 별개로 하고 심판이 무엇이냐 하면 내버려 둔 것이다. 죽어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 뽑아낸 것 아닌가? 뽑아내면 나머지는 죽은 거지, 나머지를 또 어딘가에 버려야 심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이 개념은 무지하게 중요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참 좋은 인싸이트라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데, 요한복음 3장을 할 때 심판 개념이 분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구원을 못 받으면 심판이지, 구원을 못 받으면 어디 심판의 중간쯤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이게 양단간에 흑과 백이 구분되는 상태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심판 아래 있다는 강력한 이것을 받아야지 나는 언젠가 구원받을 수 있는 거지 이렇게 보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심판의 개념이 흑백이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3장에서 얘기하는데 빛과 어둠이다. 이것이 1장의 큰 주제다. 1장의 큰 주제이면서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다. 계속 어둠과 빛을 얘기하는데 빛이 진리이고 그 1장에 있는 주제를 찾아내야 한다. 3장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몇 개가 나오나? 한 서너 가지가 나온다. 21절까지의 주제가 한 서너 가지가 나오는데 이게 36장까지가 계속 같은 주제가 나온다.
첫 번째 주제는 뭐냐. ‘하나님께로부터’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출처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거듭남이라는 것도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게 하나님으로 거듭난다는 얘긴데 예수님이 위라는 말은 영이다. ‘다시’라는 의미도 있지만 ‘위로부터’라는 얘기다. ‘위’라는 건 ‘영’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가지고 육과 영을 얘기하는데 ‘땅과 하늘’, ‘아래와 위’ 이게 요한복음의 가장 큰 주제다. 이게 예수님이 3장에서 영과 육을 얘기하고 있는 거니까 상당히 중요한 주제이고 바울까지도 넘어가는 그런 큰 주제이다. ‘위와 아래’ 그러니까 성령님은 ‘위’고 ‘영’이니까 ‘아래’는 ‘지금 우리의 있는 세상’, 그러니까 ‘땅의 일’이라 그러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들을 ‘땅의 일’이라고 그러고 아까 하늘의 일 이렇게 얘기하잖나? 그러면 ‘땅과 하늘’이고 ‘영과 육’이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뒤로 넘어가면 어떻게 얘기하나?
인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아까 김진선 교우가 얘기했듯이 야곱이 사다리 왔다 갔다 하는, 그러니까 위와 아래가 지금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사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봤다는 얘기가 벌써 하늘과 땅의 문제, 구원의 사건이 거기서부터 꿈틀거리는데 ‘위와 아래’가 뭐냐 예수님은 이미 위에서 왔고 또 위에 계신 분이다. 그러니까 위에 계신 분은 한사람 밖에 없다. ‘너는 아니다. 너희들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영과 육을 ‘하늘의 영역에서 내려와서 하늘 영역에 속한 자는 예수님이다’ 이렇게 지금 얘기하는 거니까, 이게 영적인 구분을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죽음과 땅과 아래와 위와 하늘과 영 이 세 가지가 대립이 되는 이것이 바울까지 넘어가서 얘기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대표적인 게 누구냐 ‘독생자’다. 예수 그리스도가 독생자로 드러나는 것인데, 독생자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독생자가 빛이신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죄인이고 정죄가 바로 빛을 사랑하지 않고 어둠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구원의 주제가 빛과 어둠이니까, 그 얘기가 아주 대표적으로 나온 것이고 2장의 물로 포도주를 바꾸는 거듭남과 재창조에 대한 주제는 지난 시간에 나눴을 것 같은데 계속 같은 주제로 가면서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을 계속 드러내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세계로 가는 ‘빛, 어두움’, ‘위, 아래’, ‘하늘, 땅’, ‘영, 육’ 이 세 개를 다 같은 의미로 계속 대비하면서 쓰고 있는 큰 주제가 그것이 잘 이해가 되어야 계속해서 뒤에 있는 얘기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재훈 : 21절까지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질문해 보시라. 이야기해 주신 것에 더불어서 질문을 하시면 좋을 것 같다.
민경동 : 아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라는 말은 민수기에 관주가 붙어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데 이 ‘들려야 함’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상당히 단어가 함축적인데, ‘들려야 함’은 십자가로 들려 올리는 것 자체가 땅에서 올라가는 상징적인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영의 영역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 그러니까 하늘이라는 말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니까 영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이니까 하나님으로 영의 영역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을 들림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위니까 위로 들어가는 것이 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혀지는 부활의 사건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 부활 사건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드는 사건하고 이 십자가의 사건과 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내포하는 것이 들려야 된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그게 민수기 21장을 볼 때 십자가의 사건하고 관련되어 있고 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예표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재훈 : 상익 형제가 그 부분을 굉장히 궁금해 했다. 답변이 되었나?
민경동 : 그런 큰 주제들을 우리가 피비에스하면서 그냥 주변적인 거 사전 찾아서 얘기하는 거는 누가 찾아온 사람이 금방 다 얘기하고 과연 이 주제가 뭘까 하면서 1장에 있는 주제를 늘 21장까지 놓치지 않도록, ‘빛, 어둠’ ‘위, 아래’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왔다 바로 이렇게 얘기한다. 1장 3절인가 4절에서 그렇게 주제를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장재훈 : 21절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질문할 거 있으시면 질문하시고.
박중현 : 13절에 카톡방에 한번 올렸는데 ‘올라간 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에서 아직까지 솔직히 풀리지 않는 부분이다. ‘올라간’ 이게 예수님께서 내려온 상황에서 다시 하늘로 올라간 상황이 없는 데 ‘올라간’이라는 과거형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아직 이해가 안 된다.
민경동 : 상익이가 한번 설명해 달라. (웃음)
임상익 : 저요? (웃음) 이게 제가 이해하기로는 야곱이 환상을 봤을 때 하늘이 이어져 있지 않나? 사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왔다 갔다 하고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신 분이시고 그러니까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실 분이라는 예수님이 하늘에 속해 있다는 그런 말씀이신 것 같다.
민경동 : 조금 늦게 오셨으니까 한 줄로만 이야기하고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영의 영역과 육의 영역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내려오셨다는 성육신은 영의 영역에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앞의 부분까지 봐야 한다.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땅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고 위에서 아래로 오고 영의 영역에서 육의 영역으로 내려온 성육신 사건인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자로서 이 땅에 왔기 때문에 ‘인자 외에는 지금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에 속한 자가 없다. 영에 속한 자가 없다’는 쪽으로 얘기해서 예수님은 이미 하늘의 영역에 속해 있는 자니까 ‘그 예수님 밖에 영에 속한 자가 없다’라는 쪽으로 이 본문의 연결로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 되는데 그것이 앞의 위, 아래, 땅, 하늘, 육과 영 이 세 가지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그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박중현 : 하늘에 속한 자로 이해하면 되는가?
민경동 ; 그렇다. 부활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구원의 사건을 통해서 성육신한 것이지 이미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인데 육신의 땅의 영역으로 내려온 것뿐이지 하늘에 속한 자다.
박중현 : 어떤 사건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민경동 : 그렇다. 이게 결국은 사건을 통해서 올라가는 것까지 설명이 된다.
2) 22-30절
장재훈 : 이제 22-30절까지를 보겠다. 보시면서 질문이나 본문의 주제가 뭔지를 같이 동시에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궁금한 것들이나 본인이 보시면서 이 부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신 부분을 나누어 주시라.
임상익 : 저는 25절의 정결예식이 좀 궁금했다. 관주 찾아봐도 모르겠다. 관주 찾아보면 요한복음 2:6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게 정결예식을 따라 두세 통 두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있다고만 나와 있어서 이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송진업 : 아까 민장로님이 물 얘기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그러니까 물은 어떤 씻는 더러운 거 씻으려면 물로 씻는다. 그거하고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이나 이런 거 보면 밥 먹기 전에 손 씻지 않나.
김충일 : 정결예법이 앞뒤는 세례 관련된 것이라는 말인가?
송진업 : 그렇다. 세례도 물로 세례를 준다. 예수님은 불로 세례를 주시지만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기 때문에 물로 씻는 것인데 그것과 연결시키면 어떨까 싶다.
김충일 : 그렇게 해야 연결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생뚱맞게 되는 것 같다.
송진업 : 이거 가지고 다투고, 거기 다툰다고 나오지 않나? 25절에 유대인들과 결례에 대해서 변론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맞다. 네가 맞다’ 이러는지.
임상익 : 물 세례식으로 보면 되는 것인가? 정결케하는 그런 의미에서?
최종택 : 물세례, 결국은 아까 송진업 교우님 이야기하셨듯이 깨끗하게 씻어지는 과정, 결국은 거듭나는 과정을 이야기하시는 게 아닐까?
송진업 : 사실 결론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예수님으로부터.
임상익 : 그럼 주제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장 초반부의 내용으로부터 계속 거듭남의 주제가 이어지고 있다.
송진업 : 그렇다.
김진선 : 23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도 세례를 주고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 사람이 와서 논쟁을 정결예법 가지고 논쟁을 한다. 그 앞에는 예수님 제자들도 세례를 준다. 여기저기 세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뭐가 진짜냐 자기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최종택 : 세례요한도 세례를 주고 있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고 있는데 어느 분이 진짜 세례를 주는 것인가 이런 것으로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장재훈 : 저자가 세례라는 부분을 다시 꺼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 세례라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임상익 : 답이 27절에 나와 있는 것 같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아직까지 저도 답인 것은 알겠으나 의미가 좀 모호하다.
최종택 : 거기에 대한 답이 28절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가 결국은
임상익 : 저는 27절 보면서 1차적으로 드는 생각은 형식이나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홍원석 : 저는 26절의 내용에 답이 나와 있는 것 같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지금 요한이 대답을 한 것이다. 예수님의 세력이 불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불안감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난 어차피 그분 앞에 파견된 사람일 뿐이고 그분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장재훈 : 그럼 29절이나 30절의 말씀과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송진업 : 오히려 저는 34절의 그게 연결되서 핵심을 결론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닌가 하고 봤다. 22절부터 36절까지는 문단을 한 문단으로 봤다. 세례 얘기하면서 34절에 그렇게 얘기하시는 게 아닌가.
김진선 : 제자들의 질투어린 투정을 ‘선생님 사람들 다 그리 가는데 뭐하는 겁니까?’ ‘야 그 사람이 진짜다’ 하면서 ‘여태까지 내가 했는데 이제 너희들이 증인이다’ 그러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재훈 : 그럼 26절에 요한의 제자들의 상태는 어때 보이나?
김진선 : 질투? (웃음) 당연할 것 같다. 저쪽 세력이 많아지니까.
박중현 : 질투의 느낌이 26절 하반절에 보면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간다’고 했다 ‘다’ 라는 표현이 과장법을 써서 질투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재훈 : 이미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했다. 이미 고백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공공연하게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이 아직도 그 예수님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요한만 따르고 있는 부분은 뭔가 이상하지 않나?
박중현 : 세례 요한이 계속 세례를 주고 있었기에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김진선 : 자기들 것을 빼앗기기 싫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아직 세례요한이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세례를 주는데 사람들이 저쪽으로 몰리니까 인간적으로 뺏기기 싫었을 것 같다.
송진업 : 그 얘기하니까 생각나는데 24절에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더라 라는 구절이 있는데 굳이 없어도 될 구절 같은데 넣은 이유가 그걸 암시하는 것 같다. 경쟁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김진선 : 경쟁 관계가 아니고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임상익 : 그럼 이 부분에서는 주요 메시지가 무엇인가?
송진업 : 그 앞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 세례는 물세례를 얘기하는 거니까
민경동 : 상익 형제가 주제에 대해 질문했으니까 주제를 얘기하자. 좋은 질문을 했다.
김진선 : 그분은 커져야 되고 나는 망해야 된다.
임상익 : 자기 부정, 그게 핵심인가?
홍원석 : 제가 볼 때 주제는 ‘옛것이 완전히 물러가는 것’으로 보인다. 2장에서 예수님께서 새 시대를 선언하시고 21절까지 그 새 시대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얘기하셨으니까 이제 세례요한으로 상징되는 옛 시대는 완전히 물러가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라고 하는 것도 세례 요한이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다. 요한복음에서 이곳을 끝으로 세례 요한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박중현 : 그러니까 그만둬야 되는데 아직까지 그만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직 갇히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말해주는 것 같다.
김진선 : 근데 요한은 아무튼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다 죽은 거 아닌가? 그렇다고 바로 그거 했다고 광야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잖나.
박중현 : 세례 요한은 빨리 바톤을 넘겨 줘야 되었다.
민경동 : 지금 세례 요한의 태도나 이런 거에 대한 얘기는 계속 잘 얘기되고 있는데, 상익 형제가 얘기한 주제가 무엇인가? 지금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럼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1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럼 주제가 무엇인가? 1장에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슨 얘기가 나오나? 증거자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빛에 대해 증언하러 왔다 그럼 증언을 해야 될 것 아닌가 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고 증언을 해야 한다. 그럼 증언이 무엇이냐? 세례 요한이 상당히 잘 얘기했다. 어떻게 증언하냐. 그분이 드러나야지 왜 내가 드러나야 되느냐.
그런데 이거는 적용할 게 참 많다. 설교자도 증언이고 전도하는 사람도 증언인데 누가 드러나는가? 내가 드러나면 증언자의 태도가 아니다. 증언이 뭐냐 예수님을 소개해 주고 그분이 주인공 노릇해야 되는데 제자들은 ‘어 사람들이 저리로 갑니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가게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역할이다. 그래서 옥에 갇히지 않았다는 얘기는 세례요한의 그 제자들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누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 1장에서 세례 요한은 빛에 대해서 증언하러 왔다고 한다. ‘나는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해 증언하는 자다.’ 그런데 제자들은 요한이 빛인 줄 알고 따라오고 있으니까 세례 요한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옥에 가두고 참수형 당하는 것까지 그냥 아무 말 없이 갈릴리로 가서 하는 것 보면, 하나님께서 스톱 시키시는 것을 하신 것이라고까지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되었든 증언을 할 사람의 태도는 ‘내가 아니라’고 물러나야 되는데 ‘당신 설교가 좋고 당신 전도 받아서 나는 나왔다’고 자꾸 그러면 우리 광야교회 나오는데 ‘나는 윤장로님 강의 듣고 나왔습니다’ 하면 윤장로님이 드러난다는 말이지 윤장로님은 그걸 아주 싫어하셨다. 그 이유가 뭔가? 자칫하면 내가 전했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증언자의 분명한 태도 대표적인 증언자가 세례 요한인데 증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를 듣고 싶은 것이다.
왜 아까 빛이고 진리고 거듭나는 위에서 온 분이고 위에 올라간 자고 다 예수님 얘기하고 그분으로 인해서 거듭나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사람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주제가 나온 것이다. 아까 우리가 잘한 것은 콘텍스트를 보고 있는데 그건 참 좋은 것이다. 콘텍스트를 보면서 살짝 살짝 같은 주제를 연결시키면서 주제를 바꾸지 않나. 1장 주제를 계속 어떻게 끌고 가는지 보면 요한복음 주제가 흔들리지 않고 잘 드러나는데 자꾸 지엽말단적인 것 가지고 하면 주제 없이 얘기하니까 뭔가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까 상익이 같은 질문을 혼자 공부할 때도 해야 한다.
김진선 : 더 들어가기 전에 제가 저번 주에 질문했던 거 혹시 기억나시나? 왜 예수님은 처음 공생애 시작하면서 혼인잔치를 먼저 갔나. 성전 청결 사건을 먼저 하지 왜 이렇게 했나에 대해서 지난번에 논의하다가 지나갔다.
왜 혼인잔치집부터 먼저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느냐 이 부분이 이번 주에도 계속 궁금했다. 그런데 누가 그 질문을 했다. 요한복음이 2장에서 4장까지 한 문단이라고 한다. 첫 문단이 구약시대 언약, 하나님의 결혼관계가 어그러져 있는데 예수님이 도래하면서 혼인잔치 비유가 관계 회복이라고 한다. 관계 회복이고 지금 나타난 3장은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최고봉, 이 사람은 우리가 보기에는 정결례 때 모든 걸 다 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자의 대표인데 실상은 아직 어두운 상태고,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이 사람은 천국을 볼 수도 없는 자인데 예수님을 만나서 바로 천국에 눈이 떠지는 그 사건을 한 문단으로 봐서 지금 22절에서 30장이 중간에 놓여있는 사건이라고 한다. 그 설명을 해주는데 그렇게 전체적으로 보니까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왜 예수님은 잔치집부터 가셨지? 나는 그게 계속 궁금했다. 성전에 가서 청결부터 하고 하지 했더니 2장부터 4장까지가 그렇다고 그렇게 보니까 조금 이해가 되었다.
송진업 :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질적인 변화니까.
김진선 : 관계 회복으로 어그러져 있는 구약 시대에서 예수님이 오면서 혼인 잔치의 어떤 천국 잔치 이런 걸로.
민경동 : 그건 좋은 힌트니까 힌트대로 받는데, 혼인잔치는 배경이지 주된 내용은 아니다. 혼인잔치에 가서 포도주가 떨어졌으니까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 혼인관계의 회복이 아니고 질적인 변화다. 새로운 창조를 얘기하는 건데, 그 새로운 창조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거니까. 새창조가 되는 것이 새언약관계가 형성되는 거니까 그렇게는 볼 수 있는데 혼인잔치라는 배경을 왜 두었을까라는 점에서는 학자들의 그런 얘기가 있는데 이 핵심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측면보다는 새롭게 창조되는 그것이 결국 관계의 회복을 얘기하는데 그러니까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3장에서 거듭남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그런 주제는 연결되고 혼인잔치라는 배경으로 보면 혼인이라는 게 우리가 언약관계를 혼인에 비유를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신랑이시고 우리가 신부로 그렇게 배경적인 의미에서는 학자들이 보는 그런 힌트를 받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 31-36절
장재훈 : 마지막 부분이 31절부터 36절까지이다.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궁금한 게 있으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자.
송진업 : 제가 카톡방에다 31절 질문을 올렸다. ‘위 땅 하늘’ 이런 개념이 나온다고. 그런데 이건 단순히 물리적인 개념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 이상의 의미인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 이상의 의미인 ‘위 하늘 땅’ 이런 개념을 잘 알 수 없으니 토의해 달라고 했고, 부활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듯이 아까 민장로님도 말씀하셨지만 ‘위 아래 하늘 땅 영 육’ 이런 개념들을 다루는데 31절에서 그것을 생각해봤다. 느끼신 대로 다양하게 이야기 좀 해달라.
임상익 : 저는 이 부분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도 들어있는 것 같고 그리고 여기 ‘인친다’는 개념도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어떤 3절에도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이런 부분도 있고 관주를 보면 인쳤다는 게 어떤 것인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로마서 4:11에 보면 참할례라는 부분도 나온다 .그리고 고후 1:21이나 엡 1:13에 보면 인을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다는 내용도 나와 있다. 이렇게 우리가 참할례 거듭남으로써 보증을 성령으로 주신 것도 그런 게 메인 포인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장재훈 :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31절부터 36절까지.
송진업 : 세례 요한으로 저는 봤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최종택 : 요한 사도가 아닌가?
송진업 : 저자가 이야기하는 거란 말씀인가? 그럼 그 윗부분,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 요한이 말한 것이다. 그랬다면.. 잘 모르겠다.
김진선 : 다른 사람인가? 세례 요한이 계속 이야기한 것 아닌가? 다른 측면으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31절은 ‘이분은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와는 기원이 다르다’ 35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다 주었다 이 왕권을 주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세례 요한이 하는 말 아닌가?
송진업 : 저도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 같다. 두 번째 소개.
민경동 : 그러면 어법이 안 맞는다. 32절 보면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명하되’ 하니까 세례 요한이 보고 들은 것을..
(전화가 오는 바람에 녹음이 끊김)
장재훈 : 저자 요한이 쓴 것이라고 하면 30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이야기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그렇다 하면 아까 계속 이야기해주셨던 하늘과 땅의 이야기 영적인 것과 육적인 이야기 이런 부분의 것들을 정리해 주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경동 : 다시 이야기하지 않나. 31절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3:3, 3:13에 나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하늘로부터 오신 이, 위로부터 오신 이 라고 한다. 이게 지금 계속 예수님을 소개하는 증언이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세례 요한만 증언하지 않고 요한이 지금 증언을 하는데 ‘위로부터 오신 이다’ 라고 앞에서 얘기한 것을 반복해서 증언하는 것을 보면 이 ‘위로부터 오시는 이’ 그 말을 3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이’ 그러니까 그게 똑같은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영의 영역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거니까 위로부터 오시는 이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이다. 이게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증언이다. 보여주시는 것이다.
장재훈 : 32절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데 이 어법 자체가 세례 요한이 말하는 어법은 아닌 것 같다. 32절과 33절은 예수님께서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 것인데 31절부터의 말은 원어상으로 볼 때 제3자가 이야기하는 그러니까 화자 자체가 3자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 그 제3자는 사도요한으로 봐야 한다.
민경동 :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적은 거니까 일단 사도 요한이 써가고 있는데 32절은 그가 친히 본 것을 얘기하는 것은 세례 요한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언이다.
김진선 : 24절에 잠깐 요한이 삽입한 것처럼 이 부분도 그랬다는 것인가?
그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라고 삽입한 것처럼 이 부분도 그랬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민경동 : 그래서 여기는 세례 요한의 증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언이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이니까 증언 아닌가. 그의 증언은 정말로 받는 자가 없지만 참되다 이렇게 증언 얘기가 또 나오고 있다. 세례 요한 말고 예수님께서 직접 증언하신다. 다 지금 복음서에 있는 내용이 ‘나는 자의로 말하지 않고 본 것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말한다’고 얘기한다. 그것이 증언이다.
장재훈 : 31절부터는 니고데모와의 사건,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의 사건을 통해 일어났던 일에 대한 부분을 사도 요한이 전지적 입장에서 쓴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설명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경동 : 중요한 게 위로부터 오고,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고, 이게 요한복음의 주제니까 다시 ‘하늘로부터 오신 이’의 주제를 잘 정리하고 맨 마지막에 중요한 결론적인 말이다. 36절이 재미있지 않나?
송진업 : 36절은 19절과도 같은 주제이다.
민경동 : 36절의 표현이 어떤가? 거기서 좀 특징적인 표현을 찾아낼 수 없나?
임상익 : 반복적인 단어가 나온다.
송진업 : 믿는 것과 순종치 않는 것 말씀하시는 것 같다.
민경동 : 그렇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송진업 : 근데 이 36절이 19, 20절하고 비슷한 것 같다. 반복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 같은데, 결론이라기보다 다시 같은 주제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1장에도 나온다. 10, 11절에 나온다. 3장 18, 19, 20, 36절.
그런데 34절에 대한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성령을 예수님께 한량없이 주시지 않나,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본문과 상관없는 신학적 질문이다.
민경동 : 신학적 질문이 아니고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송진업 :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주시고, 34절이 그런 이야기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예수님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 그렇게 읽힌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준다’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는 것도 나와서 질문한 것이다.
장재훈 : 성령을 아낌없이 준다는 것은 하나의 표현인 것 같다. 아낌없이 준다니까 부리거나 물건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성령님도 하나님이신데, 어떤 표현일 것이다. 예수님도 ‘성령을 너희에게 주겠다, 보내겠다’ 하는 것은 마음대로 부리겠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사역을 표현하는 것 같다.
민경동 :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을 계속하셨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그 성령을 내가 가면 그분이 보내실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셨다. 그런데 실제 성령이 오실 때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그가 보내시는 성령을 내가 받아서 줬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 말은 분명히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자와 성령은 개별적인 역할로 봐야지 하나님이니까 이분이 주시나 저분이 주시나 같다고 하면 점프를 하는 것이고 실제적으로 아버지께서 약속을 해서 예수님에게 보냈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는데 그 성령의 보내심을 우리가 받는데 하나님이 보내셨는데 사도행전의 표현에 보면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주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 어떤 성령을 주시는데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주는 그런 성령이니까 여기서 지금 34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었다’는 말은, 여기에서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 한정시켜서 얘기하는 건지 그건 따져봐야 한다. 아버지께서 라고 얘기할 때는 성부 하나님을 얘기하는데 하나님 그러면 정말 세분이 다 하나님이니까 그런 표현에서 어떤 표현인지는 좀 찾아봐야 되겠다.
송진업 : 로마서 8장에 가면 성령이 계시고 사람의 영이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얘기에 성령은 분명 하나님이신데 영이 인간의 영도 있지 않나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있고 인간의 영이 있는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의 영이 좀 이렇게 변화되어야 된다는 그런 의미가 많이 있지 않을까. 이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민경동 : 그 전에 사도행전 2장을 보자. 역할 분담이라는 것은 우리가 꼭 구분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싶다. 2:33에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셨다. 그런데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에게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었느니라’ 누가 부어주었느냐 하면 부어주는 최종적인 사건은 예수님이 하셨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가지고 주는 그러니까 출처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분명히 성령을 놓고 예수님이 올라가시는 것이니까 그런 구분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임상익 : 그럼 주 내용이 성령의 출처는 하나님 오직 한분이시다 이것인가?
민경동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 약속하시고.
홍원석 : 3장 34절에서 ‘하나님께서 한량없이 예수님께 성령을 주신다’ 했을 때 제가 드는 생각은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때 한시적으로 성령이 임하신다. 그런데 선지자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은 성령을 제한 없이 받으신다. 그래서 어떤 구별로서, 그 전에 있었던 예언자들보다 훨씬 뛰어나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표현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민경동 : 그런 표현일 수 있다.
김진선 : 예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성령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존재로 보는 것 아닌가? 밀접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는데 예수님은 말씀 위에 온전하게 사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성령을 한량없이 계속 그러니까 밀접한 관계 속에서 계속 본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얘기한 것 아닌가?
홍원석 : 예수님의 말씀 전하시는 사역이 성령의 사역에 의존하고 있다는 그런 부분인가?
김진선 :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온전하게 계속적으로 끝까지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
민경동 : 그것이 성령의 역할이다. 요한복음 15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성령님이 예수님을 증거한다. 15:26에 보면 성령이 나를 증거하는데 너희들도 증거해야 된다 그런 얘기를 하지 않나. 세분의 역할은 실체는 우리가 늘 구별해야 한다.
송진업 : 34절에서 얘기하는 성령님의 저기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그 말하고도 상당히 연관이 있다고 생각을 해도 될 것 같다.
홍원석 : 저도 얼핏 떠오르는 게, 민장로님께서 말씀하신 그 구절 ‘성령이 오시면 나를 증언하신다’에 의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게 주목적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은사주의 운동이나 신사도운동을 비판할 때 거기는 예수님이 아니라 늘 성령님이 주인공이시다. 그래서 그들이 이 말씀에 비추어 봤을 때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는 성령이 주인공이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해야 되는데 오히려 성령이 주인공이 되니까 비성경적인 것이다.
박중현 : 저는 34절은 아까 김진선 교우님이 말씀하신 부분이 많이 공감이 간다.
장재훈 : 3장 전체에 대해서 민장로님 정리해 주실 부분이 있으신지.
민경동 : 일단 아까 얘기한 부분이 중요한 내용이다. 늘 핵심적인 주제를 가운데 놓고 피비에스 한 것을 가지고 주제를 먼저 찾아 놓고서 계속 주변적인 것을 가지고 주제를 드러내는 그런 쪽인데 그런 훈련이 이 성경을 각자 보는 훈련이다. 우리가 지비에스를 하지 않아도 내가 이렇게 주제를 잘 찾아내고 필요한 것은 참고서 봐서 보완하면 주제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제를 코멘터리나 참고서가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코멘터리는 평면적으로 필요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우리가 찾아야 한다. 문맥도 그렇고.
그런 면에서 성경을 보는 이 훈련은 무지하게 중요하다. 늘 문맥 보고 주제 찾아내는데 3장은 2장에서 넘어오는 성전 청결도 이것은 물과 관련된 것이고 아까 가나 혼인잔치의 질적인 변화는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 그래서 이것은 위로부터 거듭나는 영적인 영역이고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영의 영역으로 들어간 거니까 이 세상의 땅으로부터는 이별을 하는 것이다.
거듭남을 자꾸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즐기면서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은 본래적인 세례의 의미와 다르다. 세상에 대해 죽고 죄에 대해 죽고 그냥 땅에 있는 것은 완전히 묻고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가는 복음이 그렇게 설명은 안되니까 자꾸 그냥 구원은 받았다고 하는데 땅에 있으면서 땅 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자꾸 거듭났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거듭나는 순간에 가치관이 완전히 변해야 한다. 변한 가치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부차적인 얘기고, 가치관이 변하지 않았는데 거듭났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잘 설명을 해줘야 되는 그런 설명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너무나 극명하게 이 거듭난다는 얘기는 요한복음 여기 밖에 안나온다. 그러면서 아주 자세하게 요한이 얘기하고 있고 예수님이 같이 얘기한 거니까 다른 복음서에서 얘기하지 않는 이 부분을 잘 드러내줘서 양파껍질같이 벗겨내 줘야 되는데 그냥 두리뭉실 공관복음에서 하는 거나 두리뭉실해 놓고서 그냥 아직 나를 땅에 묻지도 않았는데 자꾸 뭐뭐 이러면서 변하지 않았으면 변하지 않았다고 가르쳐 줘야 되는데 변한 것처럼 취급하고 헌금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종교 생활을 하게 하는 이것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장로까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3장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게 뭐고 빛과 어둠, 위와 아래, 땅, 하늘 이 부분을 분명하게 해서 소속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복음을 얘기를 해주고 반복하면 정말 땅에서 위로부터 오신 이 하고 마지막 31절에서 그래서 3장은 너무너무나 중요한 복음의 내용을 요한이 잘 설명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같다.
그래서 빛과 어둠의 영역을 넘나들지 않고 이쪽으로 넘어오는 영적인 확실한 구분, 그래서 이 빛이라는 존재가 지금 빛이 무엇이냐 이거다. 어둠에 있으면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직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요한의 주제는 너무나 명쾌하다. 하나로 불쑥불쑥 각 장마다 큰 주제는 하나씩 나오니까 그걸 꼭 짚고 넘어가고 다른 주변적인 것은 그걸 설명해 주는 보완적인 자료로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는 이건 이겁니다 해서 다 본문이해를 하는 데는 지장이 없도록 토론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되고 주제가 뭔데 지금 이렇게 찾았는가 하는 것을 한 시간 정도 토론하면 상당히 복음이 뭔지도 더 잘 정리되고 그렇게 했으면 좋을 것 같다. 아주 좋은 토론이 시작이 되었고 너무 좋은 모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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